마취소녀 차 선생 편
지금은 같이 근무하지만, 그때는 다른 대학에 계셨던 분으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교수님, 4학년 학생이 하나 있는데요. 혹시 대학원에 추천해도 될까요?"
"그래요? 마취에 대해서 관심이 좀 있나요?"
"이 학생이 마취를 너무 좋아하고 공부하고 싶어 합니다. '마취소녀'에요."
"그럼, 한 번 동물병원 기본실습을 해보라고 하시죠."
"네, 알겠습니다. 그럼 마취소녀를 보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취소녀 차 선생은 방학기간 동안 2주간의 마취통증의학과 실습에 참여하였다. 실습하는 내내 해맑은 얼굴로, 매일 신난 표정으로 마취하는 환자 옆에서 재잘재잘 물어보며 '와, 이거 너무 신기해요. 마취가 너무 재미있어요'하면서 동물병원에서 생활하였다.
그렇게 마취소녀 차 선생은 대학원에 입학하였고 2년간의 과정을 마쳤다. 마취 중 혈압을 측정하는 튜브의 길이가 실제 측정되는 혈압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차 선생의 논문에 대한 개념과 실험 진행, 그리고 얻어진 결과의 해석과 논문 작성, 투고하여 출판하기까지 오히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싫어했던 (왜 비탈길에 있는 나무토막의 힘을 계산해야 하는지 아직도 이유를 모르겠음) 물리학을 공부해야 했다. 파동과 주파수, 직경과 길이에 의한 영향 등 이전에는 무의미했던 많은 것들이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영향인자로 등장하였다.
차 선생의 논문은 그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던 단순한 생각에서 우리를 각성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왜 혈압을 재는 튜브는 일반 수액투여에 사용하는 튜브보다 더 딱딱한 튜브를 사용하는지, 그리고 왜 25, 50, 100 cm 등 여러 가지로 구분되어 있는지 연구하는 과정에서 같이 공부할 수 있었다. 필요는 공부의 어머니가 되었다. 이 세상에는 비탈길에 있는 나무토막의 힘을 계산해야 하는 이유를 아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마취소녀는 석사학위를 마치고는 수의사로서 전문병원에 마취과장으로 일을 진행하였다. 학교에서 하던 대로 밖에서도 열성으로 전반적인 진료를 도맡아 하다가 지금은 서울시내의 모 동물병원에서 마취과장으로 즐겁게 근무하고 있다. 해맑은 목소리를 들려주는 마취소녀는 오늘도 주위 사람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고 있다. '하하하, 교수님 이거 너무 웃겨요~!' 그 목소리와 웃는 얼굴이 눈에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