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이성을 다시 신뢰해도 될까? /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가벼운 마음으로 글을 읽어도 좋다.
어려운 얘기를 쉽게 할 때 쾌감을 느끼는 정민이가 차근차근 설명해줄 테니까.
글을 읽을 때 종종 인물의 이름이 낯설어 이해가 힘든 경우를 겪곤 했다.
그래서 이따금씩 인물 이름을 익숙한 이름으로 바꾸어가며 읽는다.
아도르노를 '아돌', 호르크하이머를 '헐크' 등으로 바꾸어 이해해도 좋다.
이름을 아는 것보다 내용을 아는 게 더 중요하니까!
배경만 이해해도 거의 다 끝나는 책!
책 [계몽의 변증법]은 제목부터 숨이 막히는 느낌이다. 계몽은 무엇이고, 변증법은 또 대체 무엇인가. 그러나 쉽게 말해 '인간의 이성을 믿을 것이냐 말 것이냐'의 고민을 스스로 주장하고 반박하면서 그 근거를 써놓은 책이다.
모든 책은 출판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알아야 이해하기가 쉽다. 계몽의 변증법 역시 그렇다. 1933년에 히틀러가 독일의 정권을 잡고 유태인에 대한 핍박을 가한다. 여러 차별 정책을 펼치면서 나중에는 유태인들이 모여 살도록 마을을 만드는데 이른바 '게토, ghetto'가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에는 래퍼들이 '할렘'이라고 많이 쓰는 빈민가를 대체하는 용어로도 많이 쓰지만 본래의 어원은 히틀러 정권 당시의 '유대인 밀집 거주지역'이다. 그 모습이 현 중국 신장 위그루 지역의 모습과 어딘가 닮았다.
공교롭게도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 둘 다 유대인이었다. 이들이 속한 학자 집단이 현대의 사상계를 쥐고 흔드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인데, 이 학파 소속의 학자들 다수가 유대인이었다. 정식 명칭은 '사회과학연구소'였다. 1931년에 12명의 멤버로 연구를 시작하였는데, 히틀러가 집권하고 유대인에 대한 적개심을 정책으로 드러내며 국민들을 선동하자, 사회연구소의 소장인 호르크하이머는 1934년에 미국으로 망명하여 뉴욕에 있는 콜롬비아 대학에 자리를 잡는다. 그래서 이들의 본거지가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출신 대학인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콜롬비아 대학으로 이동한다. 이 책도 미국에서 연구하던 시절 쓰기 시작해 2차 대전이 끝나고 1946년에 출간된다.
마르크스의 삑사리?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사상적 기반은 칸트와 마르크스였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몇몇 예언이 빗나가자 마르크스의 사상을 그대로 계승하기보다 시대에 맞는 개량이 필요하다고 보고 방향을 조금씩 달리하였다. 가장 대표적으로 빗나간 예언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 하에서는 노동자(프롤레타리아)가 지주(부르주아, 사실 중간관리자로 봐야 맞다)에게 반발하여 대대적인 혁명이 일어나고 사회적인 혼란이 심해져서 체제가 붕괴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혁명은 오히려 사회주의-공산주의 국가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나며 사회 혼란이 생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두고 마르크스주의(이론)의 패배로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회-공산주의 체제의 대표 주자인 레닌과 마오쩌둥 모두 마르크스의 이론을 오롯이 반영한 정치-경제 체제를 구축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두 지도자 모두 소련과 중국의 사정에 맞게 빼거나 더하는 과정을 거쳐 실행함으로써 허점을 드러냈고, 때문에 두 나라의 체제 성과를 두고 마르크스 이론에 대한 평가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자본주의 국가가 더 경제적 우위를 점하는 시대 상황이었던 것만은 사실이기에 마르크스의 이론이 힘을 잃고 있던 시기였다. 그래서 프랑크푸르트 학파도 수정 보완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본인들이 망명한 곳이 미국의 심장 '뉴욕'이었기에 더 그렇지 않았을까?
인간의 이성을 다시 신뢰할 수 있나?
가장 중요한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다.
"인간의 이성을 다시 신뢰할 수 있느냐?"
근대 철학의 창시자인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 이후 인간은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이성을 중심으로 생각(사유)하기 시작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2000년 동안 새로운 철학 체계의 구축이 없었던 걸 감안하면 데카르트는 그 시대의 혁명가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그런데 그 이성에 기반한 지식과 발전, 즉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이 꽃을 피우며 이루어 낸 호황의 끝은 바로 제1-2차 세계대전이었다. 더구나 여러 전범국 중 두 전쟁을 모두 일으킨 전범국은 바로 '독일'이었으며, 2차 대전에서는 '인종청소'라는 말도 안 되는 명목 하에 벌어진 유대인 학살(홀로코스트, Holocaust)로 인류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 규모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자그마치 600만여 명의 유대인을 학살했는데, 현(2020) 대한민국의 인구로 따지자면 대구(242만 명)와 부산(340만 명) 두 도시의 인구를 합친 것보다 많은 인구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면 된다.
'인간이 자연의 지배자'라고 당당히 외치던 인류는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고민한다. 과연 인간의 이성을 다시 신뢰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래도 인간의 이성을 다시 신뢰해보자'라는 답을 내린다.
책은 그러한 결론을 내리기까지의 사고 과정을 담고 있다고 보면 된다.
자, 여기까지의 내용을 이해했다면, 당신은 이미 이 책을 읽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단, 지금부터는 책 속의 문장과 함께 정민이가 코멘트를 달아 놓았으니 참고하시면 된다.
보시면서 당신의 생각은 어떠한지 스스로 답해본다면 더욱 깊은 사유의 시간이 될 것이다.
[문화산업 : 대중 기만으로서의 계몽] 부분에 대해서만 발췌하였다.
문화산업 : 대중 기만으로서의 계몽
문화는 대중에게 오락거리가 되고 계몽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문화산업은 자본가들에 의해 움직이며 대중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그 틀 안에서 놀아날 뿐이다. 심지어 대중의 기호조차도 이미 주입된 사회의 가치체계 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문화산업은 소비자의 욕구가 얼마든지 실현될 수 있을 것처럼 제시하지만 소비자로서 욕구를 표출하면 할수록 문화산업의 객체임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문화 산업에서 선전(propaganda)이 승리했으며, 소비자들은 문화 상품을 꿰뚫어 보면서도 어쩔 수 없이 거기에 동화되지 않을 수 없다.
채정민의 비평
혹 어떤 이는 소비자의 권한이 강해졌고, 새로운 플랫폼의 등장으로 ‘계몽의 변증법’에서 보는 문화산업의 관점이 오늘날에는 적용할 수 없다는 의견도 내놓는다. 하지만 발제자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플랫폼을 설계하는 자는 모든 권한을 가졌다. 소비자는 오직 설계자가 설정한 방식으로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반응할 수 있다. 관여 정도 역시 설계자가 정한다. 몇몇 문장을 제외하면 오늘날에도 충분히 적용하여 볼 수 있는 훌륭한 통찰이다.
p.187
“대중사회에서 정화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권력 소유자들의 비위를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
게이트키퍼의 위치는 오늘날에도 존재한다
p.190
“오락물의 내용들도 겉보기에는 변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변화 없는 반복”
문화 예술을 좋아해서 체계와 속성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하였는데, 알면 알수록 콘텐츠를 분류하고 분석하는 데에 더 익숙해졌다. 그 후에는 대부분의 콘텐츠에서 기시감을 느끼게 되었다.
p.192
“문화 상품의 속성은, 제작물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민첩성과 관찰력과 상당한 사전 지식을 요구하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사유하는 것을 불가능하도록 만든다는 데 있다.”
문화 상품, 특히 영상콘텐츠는 적극적 사유를 하게 두지 않는다. 빠르게 전개되는 매체의 특성상 시청자가 그러한 전개를 옳다 믿게 만든다.
p.198
“위대한 예술 작품의 양식이 옛날부터 자기부정에까지 이르는 좌절에 스스로를 노출시킨다면 열등한 예술 작품은 ‘동일성’에 대한 대용물로써 다른 작품과의 유사성에 매달린다”
‘예술 작품’을 ‘예술가’로 바꾸어도 동일한 의미였을 것 같다. 어쩌면 아도르노는 ‘예술가’를 넣고 싶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예술가의 서글픈 현실은 대중이 기존의 주목받는 작품과 동일한 면모를 찾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작품을 좋은 작품으로 인식한다는 데에 있다. 생계의 걱정이 없는 예술가에게 예술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p.215
“오늘날 문제가 되는 것은 소비자들이 다만 한순간이라도 저항이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품는 것을 내버려 두지 않는 체계 자체에 내재하는 필연성이다. 문화 산업은 소비자의 모든 욕구가 실현될 수 있는 것처럼 제시하지만 그 욕구들은 문화 산업에 의해 사전 결정된 것이다. 소비자는 자신을 영원한 소비자라서, 즉 문화 산업의 객체로서 느끼게 되는 것이 체계의 원리다.”
오늘날에도 소비자는 여전히 객체인가? 겉으로 보기에 소비자는 주체로서 자리 잡은 것 같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예술가들도 결국 재정적인 이유로 자본에 지배당한다.
*p.234
“사회를 지탱시켜주고 있는 개인은 사회라는 보기 흉한 상흔을 지니고 다닌다. 개인은 겉보기에는 자유를 갖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사회라는 경제적·사회적 장치의 산물이다.”
개인은 사회의 산물. 그렇다면 어느 사회에 속하느냐에 따라 개인은 바뀔 수 있다. 사회의 개선은 개인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이다. 사회는 법과 제도로 그 틀을 이룬다. 따라서 현재의 발전 상황에 맞는 법과 제도를 개선하는 데에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법과 제도를 개선하는 데에 필요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정치'이다. 우리는 정치에 끊임없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지배계층에 대해 민중이 유일하게 동일한 권리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 똑같은 한 표를 가진 '투표권'이며, 경제적 이익에 의해 기울어진 사회를 바로 잡을 유일한 희망이다.
p.251
“내면 생활 전체는 자기 자신을 성공에 적합한 장치로 만들려고 노력하는데, 이러한 장치는 충동이 드러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깊숙이 문화 산업이 제시하는 모델을 따르고 있다. 인간의 가장 내밀한 반응들조차 스스로에게까지 철저히 물화되어 있기 때문에 고유한 개성이라는 이념조차 극도로 추상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개성이란 번쩍이는 흰 이빨이나 겨드랑이에서 냄새가 나지 않는 것 또는 감정이 없다는 것 이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문화산업에서 선전이 승리했다는 것과, 소비자들은 문화 상품을 꿰뚫어 보면서도 어쩔 수 없이 거기에 동화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비판 이론’ 또는 ‘프랑크푸르트학파’라고 부르는 학풍의 제1세대들이다. 이들은 인간의 이성은 인류를 야만에서 해방시키고 발전시킨 듯하지만, 사실은 재앙으로 떨어뜨렸을 뿐이며,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 제1, 2차 세계 대전과 같은 엄청난 재앙은 결국 과학 문명이 낳은 결과라고 말한다. 인간은 그럴듯한 명분과 고상한 말을 내세우지만 이성으로 무장한 인류가 저지르는 폭력은 그 어떤 야만인의 행위보다 가혹하고 잔인함을 고발한다.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으로 인해 과학이라는 잣대가 다른 모든 가치보다 중요해지면서, 사람을 평가할 때도 얼마나 도덕적이고 인간적인지보다, 무슨 능력이 얼마나 있고 어떤 쓸모가 있는지가 더 중요하게 되었다. 사람들 스스로도 상대를 이용과 억압의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뜻이다.
필자는 하버마스(아도르노 제자)가 왜 이 책을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책’이라고 말했는지 알 수 있었다. 참으로 적나라하게 인간의 오만함을 말한다. 하지만 문화산업 부분에 있어서는 호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통찰에 통쾌함을 느끼기도 했다. 알지 못하여 바꾸지 못한다면 갈 길이 까마득하지만 알았으니 어떻게든 바꿔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시 생각하니 그때의 통찰이 지금도 맞다는 건 현재도 그다지 바뀐 게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 함께 생각해 볼 문제
1)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졌는가
(서문의 물음, 12쪽)
2) 문화산업 혹은 예술계가 자본의 이해관계를 벗어나 예술 그 자체를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