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노인을 대상으로 성매매를 하는 '박카스 할머니' 미숙의 삶을 이야기한다. 종로 일대를 거닐며 '연애'를 청하거나 '박카스'를 권하는 미숙은 투박하고 퉁명스러워 보이지만 코피노(Kopino)인 민호를 이유 없이 돌볼 만큼 따뜻하고 강인한 마음을 갖고 있다. 성소수자인 티나와 장애인 도훈, 갑작스레 보살피게 된 민호까지 한 집에서 지내며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미숙은 오래전 단골 고객이던 노인으로부터 자신을 죽여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렇게 노인들 사이에서 '죽여주(게 잘하)는 여자'인 미숙은 '죽여주는 여자'가 된다.
박카스와 소주 한 병, 알 수 없는 약물로 가득 찬 가방을 옆구리에 바짝 붙여 맨 미숙에게서는 어딘지 모르게 엣지와 품격이 느껴진다. 기품 있는 그 모습은 공순이에서 가정부로, 또다시 양공주에서 박카스 할머니 소영으로 역할을 바꾸는 동안 그에게 쏟아지던 사회의 시선과 손가락질을 지나쳐 온 삶에 대한 자부심에서 나올 것이다. 미숙의 주변을 겉도는 어린 영화감독은 그녀의 기구한 운명이 궁금할 테고, 낯선 노인은 그녀에게 몸을 파는 여자라며 혀를 내두르겠지만 미숙은 개의치 않는다. 미숙의 얼굴에는 그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여인의 표정이 담길 뿐이다. 외롭지만 서글프지만 고고하고 고귀한 삶이 그 표정에 담긴다. 그래서 사회의 소수자로 읽히는 박카스 할머니 소영을 향해 감히 함부로 이야기하기 어렵다.
그런 미숙이 '죽여주는 여자'가 되고서부터는 그녀의 얼굴에 불안이라는 감정이 드러난다. '산다'는 의미를 잃은 삶을 온몸으로 겨우 지탱하고 있는 노인 남성의 죽음을 돕는 일, 그 일을 행하는 미숙의 얼굴에는 그간의 풍파보다도 더한 갈등과 두려움이 읽힌다. 그러면서도 미숙이 '죽여주는 여자'를 자처한 이유가 무엇일까.
영화의 끝자락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자신의 이야기가 들려오는 뉴스를 보며 "저 사람도 무슨 사연이 있겠지"하는 미숙의 대사. 미숙은 민호와 티나, 도훈을 끌어안을 만큼 타인의 삶을 존중한다. 상대에게 어떠한 사연도 묻지 않고 그저 그대로를 편견 없이 안아 들이는 것이다. 그렇기에 누군가의 죽음에도 이유를 붙이지 않는다. 그저 존중할 뿐이다. 삶을 존중하는 것만큼 죽음을 존중하는 것. 그것이 미숙의 살해 동기가 된다. 그래서인지 교도소에서 눈 감은 미숙에 대해서도 설명이나 이유가 불필요해진다.
영화는 6.25 전쟁이라는 역사를 통과하고, 사회의 다양한 소수자들을 스크린 위로 올려 두지만, 억지로 그 관계를 엮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의 삶을 설명하려 들지도, 어떠한 사연과 이유를 붙이지도 않는다. 3D 카메라로 촬영되었기에 그들과 거리를 두려는 의도가 조금 더 분명해졌으리라 생각한다. 그렇게 누군가의 삶과 죽음을 가만히 바라보는 영화가 바로 <죽여주는 여자>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묵묵히 경찰차에 올라 담배를 피우는 미숙의 얼굴에 비친 외로움에 울컥 감정이 솟구쳤다가 그녀의 죽음 앞에 차분한 숭고함만이 남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