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대해 첫 질문을 던지다.
2014년 12월 31일
왜 나는 아이 마음을 모를까? 하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도저히 그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질문을 던져 두었다. 나는 3살과 6살 두 아이를 키우는 6년차 엄마였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고작 6살 난 엄마였으니까!
그때의 마음을 다시 묻는다면 나는 어떤 질문을 할까?
그런데 나는 정말 아이의 마음을 몰랐던 걸까?
왜모르고 싶었던 것일까?
왜 모르고 싶었을까?
왜 아이를 통해 나를 보는 것이 두려웠을가?
왜 내 상처를 만나는 일은 무서웠을까?
왜 온전한 나를 만나면 아플 것 같았을까?
거울자아이론에서는 타인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타인에 의해 영향을 받아 자신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어느날, 그림책 <방긋 아기씨>에서 아기에게 엄마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를 만났다. 웃지 않는 아기씨를 웃게 하기 위해 왕비는 세상의 유명한 전문가들을 부르지만, 결국에는 엄마의 웃는 얼굴에 아기씨가 웃는다는 내용의 그림책이었다. 왕비가 자신이 웃어야 아기도 웃는다는 것을 깨닫는 장면이 기쁘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이것이다. 나는 내 마음을 몰랐던 것이다. 마음에 상처입은 나를 보살펴 준 적이 없는 내가 엄마가 되었다. 나는 아이의 마음을 볼 수가 없었다. 기질이 까다로운 아이라서 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글로 배운 육아의 장점이자 단점은 행위로 해결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내 마음은 모른 척하면서 좋은 엄마가 보이는 행동을 하면서 내 마음은 더 괴로워졌다. 아이를 재우고 나면 올라오는 마음들을 부정하느라 항상 에너지는 고갈되어 있었다.
나는 왜 모성애가 없지?
나는 부족한 엄마인가봐!
나는 왜 무능할까?
나는 왜 화가 날까?
화내는 엄마를 나쁘다고 생각했다. 그럴수록 차가워져 갔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마음은 차가워졌다.
왕비님의 청록 얼굴에서 나를 보았다. 아이는 종종 나에게 물었다.
“엄마 화 났어?”
“아니! 왜?“
“화가 나보여. 그럼 웃어봐.”
그럴 때는 억지로 입고리를 올리고 웃어보였다.
<방긋 아기씨>에서도 무표정의 아기를 보면서 왕비님은 질문을 한다.
“도대체 왜 웃지 않는 걸까?”
우리는 그냥 아는 것들이 있다. 분위기가 이상한 것을 감지할 수 있고, 누가 나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를 느낌으로 알아차린다.
결코 모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내가 내 마음을 볼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육아가 버겁고 힘들었으니까! 내 마음까지 알면 무너져 내릴까봐 모른 척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불가능을 모른다. 계속 나를 비춰주고, 아이 마음을 모르는 나를 바라보게 만들었다.
하나의 질문,
왜 나는 아이 마음을 모를까?
이 질문이 아이를 통해 나를 비춰서 내가 심리학 공부를 하고, 나를 찾아가는 여정을 지속하게 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