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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길 Dec 02. 2021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영화 기생충의 쏟아붓는 폭우처럼

요즘 아주 당연한 사실 하나에 무척 공감하고 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도덕경에서는 겸손을 말하는데 쓰이기도 했다지만, 나는 도무지 겸손으로 연결되질 않는다. 영화 속의 세찬 폭우만 떠오를 뿐이다. 영화 기생충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빗물은 박사장의 집을 시원하게 지나쳐 흘러내리고 내려 기택의 집으로 모여든다. 박사장 아들의 미국산 텐트조차 뚫지 못했던 물은 가장 낮은 곳으로 모여들고, 더 많은 물이 되어 기택의 몇 없던 것들조차 앗아간다. 물은 그냥 낮은 곳으로 흘렀을 뿐인데... 

 

현실 속의 물

영화 속에서 불행을 물로 그려냈다면, 현실에서는 배스킨라빈스 31 만큼 다채로운 종류의 불행들이 산재한다. 각종 발전소, 송전탑, 매립지 등등.. 높은 곳을 스쳐 지나간 현실의 각종 '물'들은 낮은 곳으로만 모여든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원자력 발전소가 있다. 원자력 발전소라는 물이 거꾸로 흐르는 그림을 보여드리려 한다.

제작 : 이제석 광고연구소 ⓒ www.jeski.org

여기에 재미 삼아 강남 원전의 장점을 적어보았다. 

1. 바로 옆에 한강이 있어 냉각수 조달 쉬움.

2. 송전시설 최소화. 

3. 서울시의 에너지 의존도 감소. 

4. 대한민국의 청정 원전기술 홍보효과. 


이런 장점들은 사실이고, 서울시의 에너지 자립률은 2%에 불과하지만, 강남 원전의 실현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강남은 차치하고 서울에라도 생길 일은 없다. 이곳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곳이니까. 


한 번 물 웅덩이가 이뤄지면..

일단 지어지고 나면 폐쇄가 어려운 원자력 발전소나 수도권 매립지처럼 낮은 곳으로 흐른 물은 웅덩이를 이룬다. 고이는 곳에만 물이 고이듯 소위 혐오시설들도 생기는 곳에만 집중적으로 생긴다. 하나의 예로 청주시 북이면에는 1990년대부터 소각장이 하나씩 들어서다가 3개의 건설 폐기물 소각장이 밀집하게 되었다. 전국 소각장 시설용량의 19%를 이곳에서 태우고, 이 마을 주민의 암 발병 확률은 전국의 15배이다. 그러나 올해 5월 환경부는 암 발병에 대한 소각장의 건강 영향을 부정하는 조사 결과를 내놓았고, 그에 힘입어 소각장 건설을 위한 기업의 노력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물 웅덩이는 쉽게 생기지만, 그 웅덩이는 스스로 메워지지 않는다. 

북이면에 소재한 진주산업 굴뚝에서 나오는 분홍 연기. 뭘 태우는 걸까?


생존권에도 경제 논리가 적용되고 있다.

원전 전문가들은 하나 같이 입을 모아 말한다. 탄소중립을 위해 청정에너지인 원전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며, 원전의 안전성에 대한 과학적 입증이 그 뒤를 잇는다. 하지만, 안전함과 청정함으로 요즘 핫한 소형 모듈 원전(SMR)이라면 어디에 두어도 좋을 텐데, 갖가지 이유로 서울은 후보지로 두지 조차 않는다.  

땅이 비싸다, 사람이 많다, 혜택을 주니까 괜찮다 등의 수많은 이유로 후보지는 영덕, 삼척과 같은 모두 낮은 곳들로 흐른다.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존권은 특별히 더 싼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런 일은 그렇게 진행된다. 

수도권 매립지를 둘러싼 인천시의 폐쇄 의지와 서울시의 연장 요구가 충돌하고 있지만, 앞서 말한 사례들을 보면 결말은 왠지 뻔해 보인다. 


정의를 따질 새도 없이 경제 논리는 이제 선의도 악의도 없는 중력과도 같아져서, 물은 언제나 낮은 곳으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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