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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연 Jun 09. 2021

최진영 「비상문」 독후감 : 자살을 떠올리는 마음.

우울증을 앓았던 유명인의 생전 모습


줄거리

‘나’ 최금도는 3년 전에 죽은 동생이 있다. 최신우는 3년 전 자살했고, 18살로 남아 있다. 최신우는 죽은 사람이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의 삶에서 여전히 살아 있다. 그의 친구나 가족들은 최신우와 관련된 과거를 복기하면서 ‘만약’을 가정하지만, 끝내 최신우는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된다.



나는 동생을 이해하지 못한다. 혈연으로 맺어진 형제지만, 내가 과연 동생에 대해 아는 게 있을까 회의감마저 든다. 어쩌면 동생 최신우에 대해 말을 할수록, 부정확한 사실만 늘여놓는 것만 같기도 하다. 그저 죽은 동생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지만, 살아 있으면 안 되느냐고 늦은 강요를 할 뿐이다. 최신우는 3년 전 죽었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선택을 했지만, 나는 괴롭고, 최신우는 내 곁에 살아 있다.


독후감



“p.48 자살이 어때서. 자기를 죽이는 게 뭐 어때서. 다들 조금씩은 자기를 죽이면서 살지 않나? 자기 인격과 자존심과 진심을 파괴하고 때로는 없는 것처럼, 죽은 사람처럼, 그러지 않나? 그렇게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끔찍할 수 있다. 그럼 죽을 수 있지. 죽는 게 뭐 이상해. 자살이라고 달라? 남을 위해 죽을 수 있다면 자기를 위해 죽을 수도 있지 자기를 구원하는 방법이 죽음뿐인 사람도 있지. "


인터넷에서 우연히 책 속의 문장을 읽게 되었다. 나는 즉시 알라딘 양탄자 배송을 통해 구입했고, 그날 완독했다. 나는 죽음에 대한 글을 외면할 수 없다. 대학교 때 자유주의에 근거하여 죽을 권리에 대해 쓰고 싶었다. 교수님은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적당한 사상가를 찾기 어려워 결국 포기했다. 좀 더 오래전에는 김영하 작가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읽었다. 자살 조력자인 주인공은 타인의 죽음에 관여한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태어나며 삶에 던져진다. 선택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무의미한 외침처럼 어떤 힘도 없는 것 같다. 법륜 스님에 따르면 존재는 주어진 것이며, 왜 사느냐 해서 사는 것이 아니다. 만약 사람이 왜 사는지 끊임없이 묻는다면 결국 종착은 자살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는 이유는 본래 없고,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지 탐구하라고 하셨다. 스님의 말씀에 공감하지만, 그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있다.



“p.27

죽고 싶었던 게 아니라…….

반지가 천천히 조심그럽게 말했다.

살 이유가 없었던 건지도 몰라.

나는 두 문장의 의미를 생각했다. 같은 말인가 다른 말인가 생각했다.

이유가 필요해? 넌 이유가 있어서 살아?

반지에게 물었다.

그런 걸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 이유가 중요한 사람들.“






오래전부터 그리고 지금도 나는 사람이 왜 사는지 질문한다. 왜 살아야 하지? 원하지 않은 삶에 무작정 던져진 것만큼 황당한 일이 어디 있지? 지금 사는 게 괴롭기만 하다면, 굳이 목숨을 보전하며 삶을 이어가야 하나요? 내가 원하지 않은 삶에 대해 내가 중단하는 것이 나쁜 건가요? 삶을 선택할 수 없었다면, 죽음이라도 선택하고 싶은 마음도 있으니까.



자살은 정신적인 질병에 의한 자기 파괴로 여겨진다. 정신적인 질병은 특별한 것도 아니고 감기에 걸린 것처럼 마음이 아픈 것일 뿐이다. “p.16 사람마다 시력이 다르듯 존재의 어둡고 습한 부분을 유독 잘 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남들은 찾지도 못하는 얼룩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남들은 듣고도 들을 줄 모르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 감각이 그쪽으로 유별나게 발달한 사람들. 나는 신우가 그런 사람이었다고 믿는다. 신우는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본 것이다. 내가 듣지 못한 것을 들었고, 듣지 않은 것까지 알았을 것이다. 강렬하고 압도적인 그것에서 눈과 귀를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은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한 자기 결정권에 따른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자유는 소유권에 전제하는 개념이다. 인간은 자신의 신체와 정신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며, 그 소유권은 자기 자신에게 제한된 배타적인 권리이다. 윤리와 도덕성을 운운하며 생명의 숭고함을 강조하지만, 괴로움을 감당하며 사는 멀쩡한 목숨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타인의 슬픔과 괴로움이 걱정되어 자신의 불행을 방치하는 것은 괜찮은 것인가.





소설 속 ‘나’는 이미 죽은 동생에게 살아 있으면 안 되느냐고 물어본다. 남은 사람을 생각해보라고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상상 속 동생은 ‘나는 괴로워도 돼?’라며 응수한다. 누군가 자살하면 사람들은 남겨진 사람들의 몫을 걱정한다. 상실에 대한 고통과 괴로움은 살아 있는 자의 몫으로 전이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떠나면 남겨질 사람을 생각하세요.’라며 아픈 사람을 겁박한다. 너만 힘든 것도 아니고, 너보다 아픈 사람이 있는데 누군들 우울하지 않고 죽고 싶지 않았겠냐며 그럼에도 살아야하지 않겠니? 라며 회유보다 압박에 가까운 소리가 오고 간다.



그건 말이 아닌 소리다. 듣는 사람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말이라면 그건 공기를 채우는 소리에 불과하다. 삶이 괴로운 사람들은 정작 자신이 듣고 싶었던 말을 듣지 못한 채 다른 사람들을 걱정하는 소리만 실컷 듣게 된다. 그건 돌이킬 수 없는 죽음 뒤에도 마찬가지다. 자살자의 죽음은 죽음 뒤에도 여전히 타인의 입장에서 해석된다. 그 해석의 중심은 떠난 사람이 아닌 남겨진 사람들에 있다.





이해할 수 없다. 사람이 내가 아닌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고 바라지도 않는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배려는 ‘인정’일 뿐이다. ‘저 사람은 저렇구나.’로 끝내고, 그외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는 것이다. 다른 해석을 시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존중할 수는 있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도 종종 실패한다. 사람은 ‘나’를 떼고 누군가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신에 대한 입장 없이 타인을 바라볼 수가 없다.



특히, 가까울수록 그렇다. 그래서 자살은 불경한 것처럼 금기시된다. 죽음의 이유를 붙이는 건 죽은 사람의 역할이 아니다. 부정확하거나 엉성한 추측만이 난무하다. 자신의 삶이 끔찍하고 어떤 희망도 품지 못한 채 나락의 시간을 보내지 않았던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 내 자신이 끔찍하고 더럽게 싫은 그 기분을 결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살아야 할까 죽어야 할까. 사는 게 사멸한 것과 다르지 않고 죽은 게 오히려 살아있을 것만 같을 때, 누가 그 선택에 대해 비난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니 사실 무의미해. 그것 역시 죽지 않은 사람들의 입장일 뿐이니까. 사람은 결국 이기적이고, 자기가 괴롭지 않고 싶은 게 뭐가 어때서.

그런데 나는, 소중한 사람이 스스로 세상을 등진다면, 단 하나의 비난도 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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