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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밸류어블 Jan 20. 2020

꾸준함이 주는 안정감의 가치

꾸준함이 때로는 새로운 도전보다 가치가 있습니다.

라떼는... 얘기 한번 해볼까요?

요즘 엄청난 이슈몰이를 하고 있는 양준일이 데뷔한 1991년, 그해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70년대에 태어나 90년대 학번을 달고 '요즘 신세대는 달라'라는 얘기를 들으며 입술에 검붉은 뱀파이어 립스틱을 바르던 내가 어느덧 라떼는...을 나도 모르게 입에 달고 40대의 끝자락을 붙들고 있는 갱년기가 두려운 세대가 되었다.

라떼는...

대학교를 휴학한다는 것은 등록금을 마련하기 힘들거나, 특별한 개인 사정이 있어야 하는 것으로 대학생활 4년을 꼬박 열심히 다녀 졸업하는 것이 미덕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23살에 대학교 4학년이 되었고 졸업 전에 취업해야 똘똘하게 대학생활 한 사람이라는 증명이었던 시절의 요구에 맞추어 4학년 2학기에 취업을 하였다.

라떼는...

육아휴직은 딸랑 2개월이 전부였다. 출산 예정일 1주일 전에 출산 휴가를 들어갔고 제왕절개로 아기를 낳고 수술 후유증으로 허리도 채 못 편 채 퉁퉁 부은 몸을 부여잡고 출산 7주 만에 다시 출근을 하였다.

라떼는...

이직할 회사를 마련해놓지 않고 퇴직을 한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선택이라고 선배들에게 배웠다. 새로운 직장을 확정하지도 않고 장기 여행을 떠난다던가 자기 계발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직하는 회사들은 항상 당장 전 직장을 그만두고 다음날부터 출근해주길 바랬고 겨우 정리할 시간 1~2주를 얻어내기도 힘든 상황들이 허다했다.

요즘 젊은 친구들, 물론 취업하기가 너무 힘들어 고생하는 모습들이 안쓰러우면서도 그래도 좋은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다.


이렇게 구구절절 라떼는...을 얘기한 이유는

그렇게 오랫동안 이어온 쉼 없었던 나의 삶을 얘기하기 위해서이다. 초, 중, 고 12년을 개근하였고, 결석이나 지각은 용납할 수 없는 성격에 대학 4년도 모범적으로 다녔고 그리고 이직을 할 때조차 1개월 이상 쉬어본 적 없이 사회생활을 하였고 심지어 아기를 낳고도 7주 만에 다시 회사에 복귀하여 21년을 커리어우먼으로 살아온 나다.

어찌 보면 피곤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삶이었고, 누군가는 이제 일 그만하고 싶지 않냐고 물어보기도 했고, 그렇게 사는 삶이 지루하지 않냐고 묻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나에게 이렇게 끊기지 않은 꾸준한 삶이 그 어떤 누군가의 다이내믹한 삶보다 안정적이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런 나에게 4년 전 처음으로 주어진 휴식 같은 새로운 삶이 제안되었다. 남편의 주재원 발령으로 미국에서 살아볼 기회가 생긴 것이었다. 주변에서는 부럽다고 난리였다. '이제 일 그만해도 되겠다, 이놈의 회사에서 벗어나서 좋겠다, 미국에서 신나게 살아봐라~'하지만, 나는 두려움이 컸다. 그 두려움은, 물론 새롭고 낯선 곳에서 살아가야 하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더욱 큰 두려움은 나의 일상이 흔들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20년을 넘게 내 삶의 절반을 차지했던 나의 일을 내려놓고 떠나야 하는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하나밖에 없는 아이의 미래와 가족을 위해, 그리고 나의 발전을 기대하며 미국으로 떠나오기로 마음먹었고 어느새 미국에서의 4년이 흘렀다.


4년이 지나 이제 6개월 후면 다시 귀국을 한다.

그 사이에 나에겐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미국의 삶은 완전히 달랐다.

 아이를 매일 학교에 데려다주고, 데리고 와야 했다. 학교뿐 아니라 학원, 운동, 모든 활동은 나에게 우버 기사 못지않은 운전을 하게 만들었다. 배달문화가 전혀 없는 이곳에서 한국에서는 일주일에 1~2번 요리를 하고 친정엄마가 옆에서 음식을 항상 나누어주셨던 나에게 매일 요리를 해야 하는 고통을 안겨주었다. 아이가 학교를 가고 나면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가정주부들은 그 시간에 밀린 청소, 요리, 빨래, 장보기 등을 하고 만나 서로 레시피를 공유하고 각 마트별 우수 상품을 공유하며 어는 쇼핑몰에서 무슨 세일을 한다는 알찬 정보공유를 했지만 처음엔 정말 그 시간을 그렇게 쓰는 것이 이해가 전혀 되지 않았다.(지금은 아주 잘 동참하고 있다.^^)

나의 꾸준했던 삶의 방식은 완전히 새로운 미국에서의 삶에 다른 가치를 부여해주었다.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게 평생 한이 되었던 나는 아이가 학교에 가 있는 그 시간에 4년 동안 꾸준히 최소 주 3회 영어 클래스를 참석하고 한 달에 한 권 이상 영어책을 읽는 것을 지켜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가 쉽게 느는 것이 아님은 진작에 깨달았다. ㅠㅠ)

업무상 트렌드에 민감해야 하고 업계의 흐름을 파악해야 감을 잃지 않는다는 생각에 수업이 없는 날은 가능한 한 맨해튼에 나가 뮤지엄도 자주 가고, 핫플레이스를 가보고, 화장품 스토어에 들어가 시장조사도 하고, 사진을 찍고 블로그에 꾸준히 업로드했다.

기회가 있으면 프리랜서로 일도 꾸준히 했다. 한국화장품의 특성과 미국 K-Beauty의 방향을 분석하고 접목하여 미국 시장에 맞는 K-Beauty를 셋업하고 콘셉트 화하는 작업, 한국에서 지금까지도 나를 찾아주는 고마운 분들과의 지속적인 작업도 했다.

그리고, 책을 출판하는 것이 꿈이었던 나에게, 한국에 있을 때는 일에 치여 글 쓸 생각을 할 여력이 없었는데 미국에서 브런치를 알게 되었고 이렇게 소소하게 나의 글을 읽어주는 구독자들에게 감사함을 느끼면서 글을 쓰게 되었다. 얼마 전에는 월간 리크루트에서 인터뷰 제안이 와서 2019년 12월호에 화장품 마케터의 세계를 알려주는 글이 개제 되기도 했다. 나에겐 정말 가치 있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도전을 권유하듯 말한다.

"미국에 사니까, 영어 엄청 잘하겠네?" " 미국 갔으니 석사학위 하나 받아와". "미국에서 왜 취업 안 해?"

"그냥 미국에 눌러앉아, 한국 경기도 안 좋은데 뭐하러 들어오려고 해?"

"야~ 너 이제 나이도 있는데 사업해! 무슨 재취업이야, 너 나이 많아서 이제 어려워" "네 나이에 왜 남의 밑에서 일하려고 해?" " 도전해봐~"

정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말을 한다.

상황을 잘 알지 못하고, 나를 잘 알지 못하고, 그냥 감정 없이 내뱉는 말들이 가끔은 참 화가 난다.

미국에서의 삶은 나에게 엄청나게 큰 도전이나 성과를 주지는 않았지만 나의 꾸준함으로 이루어낸 많은 가치 있는 시간이 남았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난, 지금까지 꾸준히 열심히 살아온 나의 삶의 방식이 너무나 안정적이고 편안하다. 4년의 변화는 나에게 상황을 변화시키긴 했지만 근본적인 나를 변화시킨 것은 아니다. 그저 다른 모양으로 표출될 뿐이다.

도전하지 않는다고 욕하지 마라. 크게 변화하지 않는 삶을 지적하지 마라.

꼭 큰 변화만이 도전은 아니다. 꾸준히 자기 자신의 모양을 다듬고 하루하루 자신과 만들어가는 삶 자체가 도전이고 변화인 것이다. 꾸준히 지치지 않고 한걸음 한걸음 내가 사랑하는 나의 삶의 방식을 지켜가는 것이 그 어떤 큰 도전이나 변화보다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큰 도전을 앞두고 있는 분들이라면 용기를 내어 자신감 있게 도전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지금의 삶이 큰 변화가 없다면 더없이 감사할 일이다. 변화 후의 불안감을 누구보다 느껴본 사람으로서 꾸준함이 주는 안정감에 분명 감사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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