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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밸류어블 Apr 01. 2020

혹시나? 역시나! 행운이나 기적 따윈 없었다.

미국 입시를 마무리하는 중인 수험생 엄마의 인생 고백

"안녕하십니까, 귀하의 수험번호를 누르고 별표를 눌러주십시오.

수험번호 11111111 ○○○ 님은 불합격되셨습니다. "

새벽부터 눈이 떠져 긴장되고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가만히 기다릴 수 없어 방바닥을 벅벅 걸레질하며 발표의 순간을 기다렸던 1990년 겨울. 그러니까 그때가 벌써 30년 전이 되어버렸지만 아직도 그날의 그 긴장되고 좌절되던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인터넷도 없었던 시절, 자신의 성적에 맞는 학교를 먼저 선택하고 그 학교에 직접 방문하여 원서를 사고, 풀로 증명사진을 붙이고, 종이로 된 수험표를 잘라 가슴에 붙이고, 자신이 지원한 학교에 가서 학력고사를 치르던 시절. 오로지 단 한 번의 기회로 단 하나의 학교에 지원해야만 했던 슬픈 시절. 나는 그 단 한 번의 운명적 선택으로 평생 잊을 수 없는 아픈 기억을 남겼다. 그렇게 불합격 전화를 몇 번이고 다시 걸으며 ' 내가 수험번호를 잘 못 눌렀을 거야, 자동응답 기계에 오류가 있었을 거야' 하며 눈물을 쏟았던 기억. 그날의 기억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하다. 그때 사실 학력고사를 망쳤었다. 수학이 너무 어려웠고 평소 내가 받던 점수보다 20점은 하락할 것이라는 예상을 했지만, 그래도... 난 기대를 놓지 않았었다. '나만 못 본건 아닐 거야'라며...'난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거야'라며 기도 많이 했으니까...


전후기 분할 모집이 있었던 그 시절, 나는 그렇게 가고 싶었던 전기모집 대학에서 낙방했고 재수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안정권 후기대학을 보험처럼 합격시켜 놓았다. 하지만, 재수를 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로 합격된 학교에 진학하게 되었고, 그 선택은 좀처럼 선택에 후회하지 않는 나에게 평생 후회를 하게 만든 중요한 사건으로 남았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학교 네임밸류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끼며 살았으니까...


어찌 보면 그때의 나의 선택은, 지금 돌아보면 결국 나에게 그리 나쁜 선택만은 아니었다.

만족할 수 없는 학교 네임밸류를 극복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살았고, 남들보다 더 애쓰며 일했고, 공부머리와 일머리는 다르다며 더 좋은 학교 나온 애들보다 일에 있어서 만큼은 절대 뒤지지 않음을 증명해 보이려고 애썼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차별성이 있는 나임을 평생 지속적으로 일관성 있게 '브랜딩'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출신 학교보다는 나의 이력에 더 관심을 갖는 시간을 살고 있다.


그렇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그 잊지 못할 순간인 대학에 들어갈 때도, 취업을 할 때도, 일을 할 때도, 결혼을 할 때도, 심지어 라스베이거스에서 슬롯머신을 당기면서도, 수많은 인생의 순간순간에, 혹시나 하는 기대, TV에 보면 참 많은 사람들이 기적 같은 일을 겪는데, 나한테도 인생에 한 번쯤은 나의 노력, 나의 가치 그 이상의 뭔가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있지 않을까 기대해봤지만, 그런 일은 결코 내게 일어나지 않았다. 하나님도 나에게 노력 이상의 그 어떤 요행도 기적도 주시지 않았다. (나는 기독교인이다. 그저 주님은 항상 나의 노력을 헛되게 하지 않으시는 분임을 알게 되었고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을 주셨다.)


그렇게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고 지금 나는 일을 멈추고 남편의 일 때문에 잠시 미국에서 살고 있다. 그것도 수험생 엄마로... 그리고 이제 그 길고 험난하고 절대 올 것 같지 않았던 수험생 엄마로서의 모든 여정이 끝나가고 있다. 아직도 나의 입시 기억이 생생한데 어느새 아들의 입시를 치르고 있는 지금의 내가 믿기지 않는다.


미국의 입시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어떤 일도 겪어보지 않고 '~카더라'를 언급하는 가벼운 언어에 화가 나기도 한다. 한국애들은 수학 과학 잘하니까 웬만하면 아이비 가는 줄 안다. 미국은 등록금이 비싸 돈만 있으면 웬만한 대학은 다 가는 거다라고 말한다. 미국에서는 공부를 한국만큼 안 해도 더 좋은 대학 갈 수 있다고 한다. 제발 잘 알지 못하면서 이런 말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 하긴 사실 나도 입시를 직접 치르기 전에는 그런 줄 알기도 했지만, 막상 몸소 겪어본 체감은 훨씬 복잡하고 어려웠다. 특히 우리처럼 미국에 오자마자 고등학생이 되는 케이스의 학생들은 훨씬 더 힘든 상황이다.


일단 미국 입시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을 아주 간단하게 보자면

1. GPA (Grade Point Average) : 미국 입시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얘기하는 것이 바로 학교 성적관리이다. 한국의 내신 성적 개념이다. 학교의 수업은 매우 타이트하고 매일매일 숙제와 퀴즈가 넘쳐난다. 그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GPA가 산정되기 때문에 잠시도 쉴 틈이 없다. 학년이 올라가면 같은 과목도 honor Class, AP Class 등 좀 더 레벨이 높은 과정을 선택하여야 GPA 평균을 높일 수 있다.

2. Test Score :대표적인 공인 시험인 SAT, AP 두 가지가 있으며 한국의 수능으로 이해하면 된다. SAT의 경우 영어와 수학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그 외의 과목의 우수성을 보여주기 위해 SAT Subject Test를 추가로 봐야 한다.

3. 학교 내 Activities : 다양한 교내 활동, 즉 운동팀, 밴드, 오케스트라와 같은 액티비티 및 대학 못지않게 다양한 클럽 활동을 말한다.

4. Volunteer Services : 지역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다양한 봉사활동을 의미한다.

5. Awards : 교내외 다양한 분야에서의 수상실적을 말한다.

6. Essay : 대학입시에서 가장 중요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에세이이다.

그 외에도 더 디테일한 요인들이 있겠지만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하게 정리해 보았다.


미국 대학 입시를 치르며 너무 많은 정보 때문에 혼란스럽기도 했고 똑같은 Fact를 놓고도 서로 다른 의견에 어지럽기도 했지만 가장 많이 들은 말들은

"미국 입시는 누구도 알 수가 없다."

"미국 입시는 운이 따라야 한다."

"성적 안 좋아도 에세이만 잘 쓰면 뒤집을 수 있다."

"어떤 집 아이는 성적은 안 좋은데 ○○○ 잘해서 아이비 갔다"

였다. 이 이야기들은 마치 공부를 잘 못해도, 위의 입시 조건들이 충족이 안돼도, 어떤 운이나 다른 요인들로 상위권 학교에 진학할 수 있다는 얘기처럼 들렸다.

입시가 다 마무리되고, 대학들의 합격자 발표도 거의 끝나가는 시점, 나의 아들 또한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며 주변에서는 환호와 통곡이 이어지고 있는 시점, 나는 이성적으로 상황을 직시하자, 위의 떠도는 얘기들의 숨은 뜻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세상에는 그 어떤 눈먼 입학 사정관도 없고, 선택받은 누군가에게만 주어지는 기적도 없고, Fact를 뒤집을 수 있는 행운도 없다. 모든 것은 Fact에 기인한 결과였다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참 신기하게도 자기도 모르게 현실을 부정하고 자기 합리화의 선수가 된다.

- 자신의 아이가 최고 학교에 합격하면 이번 입시가 엄청 어려웠고, 경쟁도 심했고, 최고로 힘든 입시였단다.

- 옆집 아이가 최고 학교에 합격하면 코로나 때문에 해외 애들이 많이 지원을 안 해서 입시가 수월했단다.

- 성적이 다소 부족한 아이가 좋은 학교에 합격하면 그 아이는 행운이 따르는 아이고 자기 아이는 행운이 안 따르는 아이라며 속상해한다.


물론 내가 하는 얘기 또한 100% 맞는 얘기는 아니다. 진짜 뭐 운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고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미국에도 입시 비리도 있었다. 단, 일반적으로 그저 행운만으로 기적만으로 되는 일은 없다는 의미라고 말할 수 있겠다.


결론은 입시에서도 결국 중요한 건 Branding이다

기본적으로 성실하게 성적관리를 하고 좋은 테스트 스코어를 장착해야 한다.

그리고 학교에서의 액티비티, 봉사활동, 수상 경력 역시 중요하지만, 그게 개수나 시간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봉사활동은 300시간 하면 좋다. 악기나 운동 중에 뭐 하나는 4년을 해야 한다. 이런 숫자들은 결국 숫자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꾸준함으로 평가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요건들이 미국 입시에서 중요한, 리더십과 지역 커뮤니티에 기여하는 정도, 그리고 본인의 관심사에 대해 평가의 기준이 된다. 그러니 우리 아이가 많은 액티비티를 했는데 입시에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 것은 운이 안 좋은 게 아니라 액티비티의 일관성이나 스토리가 약했던 것이다.

그리고 에세이는 학생의 생각과 특징, 우리 학교가 수많은 아이들 중에 그 학생을 선택해야만 하는 이유, 우리 학교에 그 학생이 적합한 이유, 비슷한 점수대의 아이들 중에 그 학생이 돋보이는 점 등이 녹아들어야 한다.

이것은 마치 브랜딩 전략과 매우 흡사하다. 결국의 Identity, Differentiation, Unique point에 대한 얘기이다. 우리가 브랜드 관리를 할 때 처음에 정립해 놓은 아이덴티티를 지켜내기 위해 일관성 있는 전략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고객에게 차별화된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커뮤니케이션하고, 엄청난 경쟁 브랜드 사이에서 살아남을 유니크한 스토리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는 브랜딩과 다를 게 없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점수 만으로, 그리 화려하지 않은 액티비티를 놓고, '그 학생은 아마도 운이 좋았을 거야. '라는 판단은 잘못된 것이다. 그 학생의 에세이가 단순히 필력에 의해서가 아닌 그 아이의 아이덴티티와 일관성 있는 스토리와 차별성 등의 무언가로 어필이 되었을 것이다. 혹의 뭔가 우리가 알기 쉽지 않은 요인이 작용했을 것이다. 에세이로 뒤집는 입시는 결국 필력으로 뒤집는 것이 아닌, 그동안 쌓아온 실력과 꾸준함의 팩트에 진정성 있는 스토리가 입혀져 입학 사정관에게 전달될 만큼 충분히 드라마티컬했다는 것일 것이다.


이 시점은 다들 궁금해 할 수 있다.

"댁의 아드님은 어떻습니까?"

ㅎㅎㅎ 참 20년을 넘게 마케팅을 하며 아들에게 브랜딩에 관한 많은 얘기와 조언을 해 주었지만, 자식 브랜딩은 아마도 이번 생애는 안되나 보다. 그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 그 노력에 맞는 결과를 얻고 있는 현실에 감사하고 있다.


나도 사람이고 엄마이다. 엄마의 욕심으로 아이를 바라보다 보면 현실의 자식을 인정하기 싫기도 하고, 주변의 소식에 배가 아프기도 하고, 질투가 나기도 하고, 깎아내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한 발자국 떨어져 객관적인 눈으로 자식을 보려고 노력하고, 남을 탓하거나 다른 곳에서 억지로 이유를 찾아 위로받으려 하지 말고, 이성적으로 정신을 차리고 보면 Fact가 반영된 결과가 보일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 행운이나 기적이 그리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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