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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밸류어블 Jul 07. 2021

출퇴근 시간만 3시간이 넘는 삶이지만...

사업의 꿈은 잠시 접어두고 마케터로 다시 시작한 요즘, 행복합니다.

아침 7시 15분 집을 나서면 9시 정각에 회사에 도착하는 삶이 시작되었다.

집에 오면 밥 숟가락 들 힘도 없을 만큼 지치는 퇴근길, 와서 씻고 정리하고 멍 때리며  TV 좀 보다가 잠이 든다.

출퇴근 시간만 3시간이 넘게 걸리는 요즘. 친구를 만나는 일도, 멋진 브런치 레스토랑에서 여유롭게 수다 떨며 시간을 보내는 일도, 여유롭게 백화점 지하에서 장을 보는 일도 다 불가능해진 요즘이다. 코로나로 집에서 수업받는 아들 밥 차려주는 일도, 함께 카페에 가서 '카공'하는 아들과 데이트의 행복도 사라졌다.


미국에서의 5년의 삶이 안겨준 경력 단절과 나이는 귀국 후 나의 업무 복귀의 걸림돌이 되었고, 남들이 겪는다는 그 서러움을 뒤늦게 겪으며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원하는 조건에 맞는 취업은 어렵다는 결론을 내릴 즈음이었다. 내 주변의 동료, 후배들은 아직도 업계에서 잘 버티고 있는데, 나만 일이 안 풀리는 것 같은 패배감은 견디기 힘들었다. 사업을 준비했다. 평생소원이었던 내 브랜드를 론칭하는 준비는 설렘 반, 두려움 반이었다. 사업하는 사람의 머리와 가슴은 회사원의 그것과는 180도 달라야 한다는데, 20년을 넘게 회사원으로 살아온 나에게는 새로 태어나는 것과 다름없는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까지 뿜 뿜 넘치는 마케터로서의 자신감과 만족감으로 살아온 나에게 이 시간들은 인정하기 싫은 나의 노화와 한계와 부족함이 고스란히 까발려지는 시간이었다. 비교는 하면 할수록 나를 더 망가뜨렸고, 나는 나 자신을 다시 한번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내 그릇의 크기를 현실적으로 재보고 나의 눈높이를 재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던 즈음, 지금 나의 회사에서 제안이 왔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포지션이었고, 조건들이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수용 가능한 선이었다. 가장 큰 걸림돌은 거리였다. 물론 차로 러시아워를 피하면 1시간이면 가능한 거리일 수 있지만, 미국에서 큰 교통사고를 겪고 아직 그 문제로 골치가 아픈 나는 한국에서 운전대를 잡지 않고 있기 때문에 장거리 출퇴근 운전은 어려운 문제였다. 회사에서 차를 줄 수 있다고 했지만 운전 트라우마를 극복하기엔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거리가 취업에 걸림돌이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많은 고민을 하고 가족, 친구들과 상의도 해보고 일단은 다녀보자라고 결심했다.


첫날, 첫 출근길에 지각. 진짜 첫날 출근하다 다시 집에 갈 뻔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다닐 일인가? 이 나이에 지하철 타고 꾸역꾸역 일해야 하나? 일주일 다니다 못 다닌다고 할 거면 아예 출근을 안 하는 게 낫나? 오만 잡생각이 드는 첫날 출근길이었다. 일주일만 일단 버텨보자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좀 더 빠른 길을 찾았고, 넷플릭스가 지루함을 달래주었고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은 지하철은 내게 앉아서 갈 수 있는 자리도 많이 허락해주었고... 그렇게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회사는 나름 만족스러웠다. 나의 신규 브랜드 기획을 위해 대표님은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셨고 직원들도 나를 믿고 열심히 따라주었고, 출퇴근을 제외한 다른 부분들은 그동안 나의 일에 대한 열망을 충족시켜주기에 크게 부족하지 않았다. 물론 많이 피곤하고 지치기는 하지만 몸은 많이 적응되어 갔고,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있는 내 마음도 함께 편해져 감을 느꼈다.


이글이 임시저장되어있다는  퇴사를 이틀 앞둔 오늘, 이글을 쓴지 두달이 넘어서 발견했다. 결국 출퇴근 거리를  이상 극복하지 못하고 퇴사를 통보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브랜드 하나를 멋들어지게 기획해주었고 직원들의 멘토가 되어 주었고 대표님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 주어, 모두의 아쉬움과 고마움을 받으며 아름다운 이별을 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기회를 만나는 행운도  나의 힘들지만 멋진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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