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초등학교 때는 장기도 두었고, 조금 더 나이가 든 중고등학교 가서는 아버지와 체스를 두었던 그 기억이, 내 기억 속에 있는 「아버지와의 추억」 폴더에서 소환되었다.
늘 아버지를 이겨야겠다는 생각이 더 많았다. 그리고, 이기고 짐을 반복하며 ‘왜 그때 폰을, 왜 그때 룩을 저렇게 두었을까’ 하는 자책도 하며 생각에 빠지곤 했었다.
앞에 상대가 아버지이든 누가 되었든 나는 나 자신과 묻고 답한다.
‘여기에 놓는 건 어때?’, ‘그래 거기야.’, ‘아니야, 거기 두면 안돼.’
그렇다 나 자신과 대화를 게임 시작부터 끝까지 나눈다.
그렇다면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단지 나랑 놀아 주는 사람일 뿐인가?
나는 누구와 체스를 두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여기 있다.
선택과 집중, 고독, 비로소 내적 자유를 얻기까지
12월 초, 넷플릭스를 평소 즐겨보는 나는 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타이틀 화면을 보게 된다.
바로 <퀸스 갬빗>(The Queen’s Gambit, 2020)이다.
<넷플릭스> 이 모습에 매료되었다.
한 여자가 체스를 둔다. 근데 그 여자의 눈이 엄청 크고 전형적인 미국인이 아닌 이국적 외모를 지닌 미모의 배우다. 어디서 본 것도 같다. 근데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걸까. ‘queen’이란 단어를 봤을 땐, 체스 대회 우승을 하겠지 뭐.
<퀸스 갬빗>을 보기 바로 전, 내 생각이다.
일단 체스 규칙을 알기 때문에(정확히 말하면 체스를 둘 줄 알 뿐이다.) 어떤 내용일지 무척이나 더 궁금했다. 다른 드라마 소개 글들을 보지 않은 채 1화부터 정주행에 들어갔다.
전날의 숙취, 허둥지둥 시합장 입장, 상대에 대한 강렬한 눈빛.
첫 화면부터 주인공 ‘엘리자베스 하먼’, 그녀의 아이덴티티를 알 수 있다. 드라마는 파리에서의 결승전 대결의 시작을 알리면서 출발한다. 그러면서 어린 시절과 교차된다. 가정불화로 아빠 없이 유일한 동반자였던 엄마를 이내 교통사고로 잃으면서 드라마는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때는 1950년대 미국, 9살의 어린 나이에 ‘머슈언 홈 여자 보육원’에 보내진 ‘베스(엘리자베스 하먼을 이렇게 불렀다.)’는 매일 보육원에서 주는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게 되고, 일찍이 수학적 재능을 보인다. 하지만, 시종일관 어린 그녀의 표정은 정말 나라 잃은 표정이다. 울지도 웃지도 않는다.
보육원의 학과 프로그램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베스’는 지하실에 건물 관리인인 ‘샤이벌’씨를 만나게 되면서 체스를 배우기 시작한다. 이렇게 ‘베스’는 체스를 통해 또 하나의 자기 자신을 창조하고 만난 것이다. 그 도움은 ‘샤이벌’ 아저씨다.
체스는 외롭고 상실감에 빠져 있는 어린 ‘베스’에게 큰 도전이 되고 본인의 수학적 두뇌와 함께 시너지 효과를 내게 된다. 그녀는 매일 밤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고 누워서 천장을 보고 상상으로 체스를 연습한다. 그렇게 체스와 그녀는 물아일체가 되는 듯했다.
<넷플릭스> 샤이벌씨와의 어릴 적 체스 대결
드라마는 그 후 승승장구하는 ‘베스’의 한 가지(체스)를 향한 집념과 집중력, 요즘 말하는 선택과 집중의 최고봉을 보여준다. 고교생 12명과의 첫 체스 대결에서 승리한 이후, 가정환경이 나아 보이는 ‘휘틀리’씨 집으로 입양되나, 그 가정도 남편이 아내를 버리게 되고, 예전 자신의 부모님과 오버랩되는 모습은 그녀로 하여금 어쩌면 남자에 대한 불신을 주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다행스럽게도 양어머니는 ‘베스’의 체스 재능을 알게 되고, 계속되는 대회에 매니저 역할을 자처하며 동참하고 힘이 되어준다. 하지만, 신은 ‘베스’의 삶을 원만하게 두질 않는다. 간염으로 결국 어머니는 함께 간 멕시코 호텔에서 조용히 눈을 감는다.
이 대목에서 내 마음까지 무너지는 듯했다. 또 혼자가 되지 않았는가. 그녀 인생은 늘 그렇게 혼자인 건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드라마는 ‘베스’가 체스 대회를 통해 알게 되고 만나게 되는 인물 들과의 ‘썸’도 보여준다. 하지만, 그녀는 쉽게 마음을 열지도, 상대에게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내심 누구 한 명과는 잘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봤는데, 그녀의 철벽과 평범하지 않은 행동 등에 뭇 남성들은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사실 드라마 속 ‘베스’를 보면서 예전에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택이(박보검)’가 생각났다. 물론, 둘의 캐릭터도 다르고, 하나는 체스, 다른 하나는 바둑을 두는 전혀 다른 업에 종사하긴 하지만, 내가 본 것은 그 둘 다 자신만의 싸움과 고독함을 늘 달고 산다는 것이다.
‘베스’는 외롭다. 오직 체스 하나만 보고 살아갔다. 그래서 친구도 없고, 이유야 다르지만 부모도 없고, 그 흔한 연애 상대도 없다.
<넷플릭스> 베니와의 대화, 대화 후 둘은 잠시 동거한다.
드라마는 종반을 치달으며 친구들이 하나둘씩 자신을 멀리하게 되고, 승승장구하던 체스 세계에서 패배의 고통을 맛보게 된다. 그러면서 그녀는 더 극도의 방황과 공허함을 드러낸다. 다만 때마침 보육원 시절 옆자리에 있던 ‘졸린’이 찾아오면서 ‘샤이벌’씨의 죽음을 알게 되고, 자신을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샤이벌’씨와 친구 '졸린’이 알게 해 준다.
‘베스’는 러시아 초청대회에서 체스 그랜드 마스터 ‘보르고프’와의 재대결을 펼치게 되는데, 이때 자신을 떠났던 친구들(베니, 해리 등)이 게임 어드전(경기가 5~6시간 이상 진행되어 휴회하고, 다음날 경기를 재개하는 것) 때 전화로 진행상황에 대해 조언을 해주며 응원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결국 다음날 ‘베스’는 ‘보르고프’와의 재대결에서 승리하고, 미국 대통령과의 미팅 자리도 준비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하지만, ‘베스’는 곧바로 떠나지 않고 차에서 내려 러시아 노인들과의 체스 한판 승부를 펼치며 그동안 자신을 가두던 내면의 장벽을 허무는 듯한 모습으로 끝이 난다.
<넷플릭스> 대회를 마친 후 러시아의 한 공원을 거니는 베스
<퀸스 갬빗>이 내 마음에 흘리고 간 흔적
내가 혼자라고 느낄 때, 사실 혼자가 아니다.
‘베스’는 늘 혼자였다. 신기할 정도로 곁에 머무르는 사람이 없다. 부모도 곁을 떠나고, 친구들도 곁을 떠났다. 다 내려놓고 무너뜨리고 싶었다. 술을 진탕 마시고, 망가지려고 하지만 그때마다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장 마음이 뭉클했던 장면이 ‘샤이벌’씨가 그동안 ‘베스’의 활약상들을 스크랩하며 멀리서나마 응원하고 있었고, 심지어 ‘베스’가 돈이 부족하다고 입양 후 첫 대회 출전할 때 경비 10달러를 도와달라고 했던 편지 조각도 보관하고 있으면서 늘 응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10달러를 그동안 값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그리고 보육원에서 함께 찍은 처음이자 마지막인 사진을 보며 그녀가 오열하는 장면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감정이 없을 법할 정도의 매서움과 날카로움으로 승부사 역할을 수행하던 그녀에게도 감정의 복받침이 있었던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곁에 없어도 나를 생각하고 응원해 주는 이들은 분명 있다. 그들에게 소홀한 적은 없었는지 나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넷플릭스> 스쿼시를 함께하는 졸린과 베스
<넷플릭스> 베스가 보고 오열한 사진
평범과 비범 사이에서 중용이 필요하다.
‘베스’는 평범한, 아니 그보다 불쌍했다. 그러나 그녀에겐 비범한 재능이 있었다. 또한, 누구도 막지 못할 강인한 정신력이 그녀를 지지했다. 한 가지 혹은 어딘가에 집중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이자 재능이다. 드라마를 보며 ‘베스’가 무척 부러웠다. 체스에 대한 놀라울 정도의 의지와 집중력, 자신이 꺾고자 하는 러시아인을 상대하고자 러시아어까지 배우는 모습은 나에게 없는 그것이었다.
그녀는 또래보다 더 이른 시기에 부와 명예를 얻었고 성숙했다. 하지만, 때로는 평범함을 동경하기도 하고, 때로는 비범한 지금을 누리는 모습도 보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다른 여자 또래들과 같지는 못했다. 안타까웠다. 그녀는 극 중 계속해서 평범과 비범 사이 그 어딘가를 찾고 있어 보였다. 내 생각엔 너무 평범한 것도 싫지만, 너무 비범한 것도 부담일 듯싶다(물론 비범을 경험은 해보고는 싶다.).
이 드라마는 정말 ‘안야 테일러 조이’가 다했다.
안야 테일러 조이 (Anya Taylor-Joy)는 1996년생으로 올해 나이 24세로 미국 플로리다 마이애미 출신이다. 그녀를 어디서 봤나 생각해봤는데, 바로, 영화 <23 아이덴티티>, <글래스>에서 23개의 인격을 가진 데니스에게 납치된 ‘케이시’ 역을 맡아서 열연했었다. 당시에도 시원한 이목구비와 극 중 역할에 꽤나 인상적이었다.
<퀸즈 갬빗>은 드라마 진행 내내 그녀에 대한 극도의 클로즈업으로 그녀의 큰 눈에서 말이 없어서도 감정과 생각을 느낄 수 있었다. 놀라웠다. 엄청난 몰입감이었다. 긴장되고 숨소리조차 크게 들리는 체스 대회장의 분위기는 내가 거기 앉아 있는 것 같은 긴장감마저 불러일으켰다. 그 미묘한 눈짓, 움직임만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충분히 보여줄 수 있는 그녀의 연기에게 박수를 보낸다.
<넷플릭스> 마지막 경기들 중
내 앞의 상대는 나를 보게 하는 거울이다.
물론, 내 앞에서 나와 체스를 두는 사람은 게임으로써 나와 겨뤄야 할 대상이다.
하지만, 치열한 현장에서 내가 상대한 그들은 모두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그 속에서 깨달음을 나 스스로 얻도록 돕는 사실상 내 인생 한 페이지에 기록될 ‘헬퍼’로서 스토리를 이어간다.
드라마 안에서 주인공 베스와 겨루기 위해서 마주 앉은 체스판의 상대들. 이 모두를 보면 극도의 승부욕과 날카로운 냉철함을 보이며 살벌함마저 느끼게 한다. 하지만, 베스가 이기고 상대가 졌을 때, 그 상대는 그녀에게 악수를 청하며 살벌했던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승복하며 그녀에게 더 큰 용기와 자신감을 불러 넣어주었다.
결코 내 앞에 있는 자가 적인 것만이 아니다. 그들과의 경험이 곧 나를 만들어가는 자양분이 될 것이다.
퀸스 갬빗은 단순한 체스 드라마가 아니다.
한 인간의 내면의 외로움, 고독을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만 이겨내려 했던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는, 소위 까칠하고 이기적인 나를 어느 정도 내려놓아도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자아성찰 과정을 담은 휴먼 에세이에 가깝다.
그렇다면, 이제 당신은 누구와 체스를 둘 것인가.
쿠키 단락(ending para.)
퀸스 갬빗(Queen’s Gambit)은 체스 용어로써, 백이 폰 하나를 일시적으로 희생함으로써 포지션에서의 이점을 가져가려고 두는 오프닝이며, 그랜드 마스터 레벨에서도 사용될 만큼 인기가 많고 분석이 많이 된 오프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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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이 폰을 d4에 먼저 두고, 흑이 d5에 두게 되면, 백이 c4를 두게 되는 오프닝 방법입니다. 이러면 흑이 c4에 있는 백을 취하게 되고 폰과 퀸이 마주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