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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경 Apr 17. 2019

08화 증거제일주의

증거기반 경찰활동

  미국 경찰은 경력관리에 있어 교통정리가 정연하다. 승진에 뜻을 두고 평생 사다리를 오르든지 아니면 전문분야에 매진하든지 둘 중 하나다. 르네미첼이라는 여경은 후자에 속한다.


  1998년경부터 미국 세크라멘토 경찰국에 근무하고 있고 캘리포니아주립大 MBA 과정과 퍼시픽大 로스쿨 박사, 영국 캠브릿지大 범죄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계급은 서젼트(Sergeant, 우리나라의 경사), 높은 계급은 아니지만 전문성을 인정받아 팀장으로 재직 중이고 미국 증거기반 경찰활동 학회의 회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경찰이 언제는 증거를 소홀히 한 적이 있던가. 법원도 증거재판주의이고 그래서 경찰도 증거 제일주의이다. 웬만한 국민들도 이런 사정은 잘 알고 있어 말다툼을 하다가도 “증거 있어, 증거 있으면 대봐”라고 소리칠 정도로 일반상식이 된 판에 새삼스레 증거기반 경찰활동이라니 ‘이건 뭐지’하는 의아함이 일었다.   

 

  르네미첼이 팀원일 때 가정폭력 신고 출동을 하였다. 남편에게 심하게 맞고 있다는 신고였다. 미국은 이런 경우 일단 수갑부터 채우고 보는가 보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남편은 실직한 지 오래되어 집안 형편이 어려운 상태였다. 요행히 일자리를 구했으나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부인은 남편과 떨어지는 걸 원치 않아 하루 종일 말다툼을 벌였고 남편이 고집을 굳히지 않자 신고를 한 것으로 몸싸움이나 폭력 행위는 없었다. 부인 몸에 있는 상처도 오늘 입은 상처가 아니었다.   

 

  안전은 확인되었고 수갑을 풀어주어야 했다. 매뉴얼에 따라 팀장에게 보고하고 미체포 승인을 구하였다. 그러나 팀장은 체포를 지시하였고 수차례 사정 설명에도 불구하고 지시는 번복되지 않았다.


  오늘 체포하나 며칠 후에 체포하나 뭐가 다르냐? 피해가 있기 전에 선조치하는 게 오히려 낫다는 논리인 것으로 보인다. 르네미첼은 현장근무자로서의 판단을 고수할 수도 있었으나 경력을 선택하였다고 당시를 술회하였다.    


  며칠 후 다시 그 집에서 신고가 들어왔고 부인은 그 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히스테리를 부렸다.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부인에게 남편의 위치와 상황을 물었으나 부인은 남편이 지하층에 있다고만 답하였다.


  지하층에 내려갔을 때 목을 맨 남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고 그 옆에는 사랑하는 아이들 사진과 그가 남긴 전 재산 35센트가 놓여있었다고 한다.    


  르네미첼이 경력에 대한 관심을 거두고 증거기반 경찰활동에 매진하게 된 계기는 자명해 보인다. 그녀가 당시 느꼈을 트라우마는 그녀를 뒤흔들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경찰관의 직무집행은 직관이나 경험, 관습, 상식보다는 현장에서의 증거가 기반이 되어야 한다고 그녀는 주장한다. 팀장의 지시가 아니라 그녀가 현장에서 보고 들은 피해자의 몸 상태나 진술, 현장 상황 등을 기반으로 조치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경찰은 밤낮없이 주로 사건사고가 많이 발생하는 빈민가 위주로 순찰을 돈다. 접근이 많은 만큼 더 많은 비행이 보이게 마련이다. 상식이나 관습에 따라 함부로 낙인을 찍는 오류는 없는지 재고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경찰활동은 타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할 수 있다. 경찰을 ‘거리의 판사’라고도 표현하지만 때로 한 인생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다. 피해자 보호도 중요하지만 피의자도 아무렇게나 다루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증거는 피의자를 처벌하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피의자 보호를 위해서도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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