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보훈의 달을 기리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일제 식민시대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아마 일본 순사가 아닐까 싶다. 특유의 콧수염에 일본도를 허리에 차고 거들먹거리며 거리를 활보하는 꼴이 밉상 맞기 그지없다. 순사라는 이유만으로도 미움의 대상이지만 한국인으로서 순사 노릇을 하며 일제의 사냥개가 된 매국노들은 증오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문제는 해방이 되고도 이 친일파들이 청산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를 극화한 것이 영화 ‘암살’이다. 이정재가 분한 염석진은 조국과 동료를 배신하고 친일파가 되었다가 해방 후에도 살아남아 대한민국 경찰로 건재한다. 영화 속에서는 여주인공인 안윤옥(전지현 분)에 의해 죗값을 치르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하는 모순과 애통함이 있다.
이승만 정권에서는 반공 경찰이 되어 민주주의의 수호자인 양 행세하지만 사실은 정권의 앞잡이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이후에도 늘 권력의 편에 서서 권력자의 심기가 불편한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해결사로서의 역할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6~70년대에는 정권에 반하는 세력을 간첩단으로 몰아 탄압하였고 8~90년대는 민주주의를 외치는 학생과 시민들을 향해 최루탄을 쏘고 혹독한 고문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등 인권을 유린하였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정권에 충성을 다하는 권력의 주구(走狗)였다. 경찰을 비하하는 ‘견찰’이라는 용어도 이런 부끄러운 역사가 오버랩 되어 붙여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모든 경찰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김구 선생은 임정 시절 지금의 경찰청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경무국장을 역임하셨고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해방 후 경찰에 복무하셨다. 2018년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 때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안맥결 前 서울여자경찰서장도 독립 운동가 출신이다. 그의 부친 안치호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친형으로 ‘맥결’이란 이름도 안창호 선생이 지어주었다고 한다. 6월의 보리가 농부에게 기쁨을 주듯이 배고픈 백성에게 첫 열매를 주는 보리와 같은 사람이 되라는 의미라고 한다. 숙부인 안창호 선생의 영향으로 안맥결 선생도 어릴 적부터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1919년 19세의 나이로 평양 숭의여학교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20일간 구금되었고 1920년 여성 독립운동 비밀결사 「결맥단」의 일원을 맡아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1937년 11월 초에는 안창호 선생을 중심으로 한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되었는데 이때 장남을 임신한 상태였다. 일제의 탄압에 굴하지 않은 그녀는 결국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만삭의 상태에서 옥고를 치르다 12월 21일 가석방되었다. 1943년 남편이 9세인 장녀와 함께 사망하여 안 선생은 어린 세 자녀와 함께 남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슬픔에 잠겨있을 수만은 없었다. 1945년 조국이 광복되자 그녀는 「한국애국부인회」 간부직을 맡아 조국 재건에 힘을 보탰다.
1946년 여자 경찰을 선발한다는 소식을 듣고 여자 경찰 간부 1기로 경찰에 투신하였다. 그녀는 1952년부터 2년간 서울여자경찰서장을 지냈다. 당시 여자경찰서는 부녀자·노인·소년의 보호, 풍속 업무 등을 담당했다고 한다. 그녀는 누군가 청탁 명목으로 뇌물을 가져오면 즉시 돌려보냈고 직원들에게도 항상 청렴과 봉사의 정신을 강조하였다. 또한 안 서장은 영어에도 매우 능통하여 미군 등 외국 관련 행사에서 통역을 맡기도 했다. 1957년 안 서장은 국립경찰전문학교 교수로 발령받아 후배 경찰들의 교육에 힘썼다.
이후, 5·16군사정변이 일어나고 군부로부터 정권에 합류하기를 권유받았으나 민주주의를 부정한 군사정권에 협력할 수 없다며 단호히 거부하였다. 결국 안맥결 서장은 군부가 주도하는 민주공화당 입당을 거부하고 1961년 15년간의 경찰생활을 마감하였다. 그리고 2018년 안맥결 서장 타계 42년 만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어 2018년 11월 17일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토벌대 대장으로 복무하며 남부군 총사령관인 이현상을 토벌한 차일혁 경무관도 해방 전 중국으로 건너가 팔로군과 함께 항일유격전을 벌인 독립 운동가 출신이다. 그는 칠보 발전탈환과 고창작전, 정읍전투 등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빨치산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가급적 귀순을 유도하여 많은 빨치산의 목숨을 살렸다. 70명의 결사 대원으로 2천여 명의 적을 격파하였고 총사령관 이현상도 사살하였다. 비록 적장이지만 그의 주검을 수습하여 예를 갖추어 화장해 준 휴머니스트이기도 했다. 그는 “이 싸움은 어쩔 수 없이 하지만 후에 세월이 가면 다 밝혀질 것이다.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벌어진 부질없는 동족상잔이었다”라고 당시를 술회했다.
1951년 5월경 남한 공비 ‘남부군’의 은신처로 이용될 수 있는 구례 화엄사를 불태우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명령을 따르지 않고 고민 끝에 적의 은신을 막을 최소한의 방책으로 문짝만을 뜯어내 불태우고 천년고찰을 지켜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후 경찰은 차일혁 경무관의 뜻을 기리며 충남 아산에 소재한 경찰인재개발원에 그의 이름을 딴 ‘차일혁홀’을 개관하였다.
독립 운동가 출신은 아니지만 차일혁홀과 함께 인재개발원에는 또 한분의 이름을 딴 건물이 있는데 이분이 바로 안병하 경무관이다. 안병하 경무관은 육사 8기로 군 복무를 하던 중 34세에 총경 특채로 경찰의 길을 걷게 된다. 1962년 특채 후 9년 만에 경무관으로 승진하여 79년 전남경찰국장, 지금의 전남지방경찰청장 자리에 오르게 된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고 신군부는 5월 18일 광주 시내에 공수부대를 투입하였다. 당시 치안 책임자였던 안병하 경무관에게도 군 병력투입 요청과 광주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진다. 그러나 그는 ‘상대는 우리가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시민인데 경찰이 어떻게 총을 들 수 있느냐’며 이러한 명령에 불복한다. 오히려 경찰의 희생이 있더라도 절대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고 일반 시민의 피해가 없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결국 안병하 경무관은 명령 불복종으로 5월 26일 직위해제 된다. 이후 10여 일간 보안사의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그 후유증으로 1988년 10월 사망에 이른다. 2005년경 뒤늦게 그 공로가 인정되어 국립현충원으로 안장되었다.
그 외 제주 4·3 사건 당시 군부의 민간인 총살 명령을 거부하고 수많은 목숨을 구한 '한국판 쉰들러'로 알려진 문형순 제주 성산포 경찰서장 등 많은 경찰 선배들이 오직 국민과 조국을 위해 충성을 다하였다. 이런 분들의 희생을 기리고 본받으려는 수많은 경찰 후배들이 있기에 우리나라와 대한민국 경찰의 앞날은 밝게 빛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