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경 Mar 27. 2019

05화 아픈만큼 성숙해진다

한 여인의 희생으로 이루어지다

  대중가요를 들으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경우가 있다. 그만큼 가요가 우리 삶을 잘 대변하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아픈만큼 성숙해진다’는 가사처럼 가슴에 와 닿는 노랫말도 흔치 않다. 이는 사랑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전반에도 적용되는 진리가 아닌가 싶다.

    

  2012년 4월 수원에서 발생한 강간살인사건은 경찰에게도 그야말로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귀가하던 20대 여성이 밤길에 오원춘이란 마수의 손에 납치되었다. 피해여성은 범인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문을 잠그고 재빨리 112신고를 하여 경찰에 간절히 도움을 요청하였다. 여성에게는 이 생의 마지막 순간이었고 오직 경찰만이 그녀의 유일한 구원자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112로 전화하여 자신이 처한 상황과 위치를 최대한 아는 대로 설명하였다. 그럼에도 접수요원은 주소만을 반복하여 물어보며 그 소중한 시간을 안타깝게 흘려보냈고 어떠한 추가적인 정보도 획득하는데 실패했다. 피해여성이 분명히 모르는 아저씨에게 끌려 들어왔다고 밝혔음에도 부부싸움이 아닌가 의심하여 기본적인 판단력조차 갖추지 못했다는 비난도 쏟아졌다.



  결국 신고 접수 13시간 만에 범인을 잡기는 하였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피해자는 잔인하게 살해되어 280여 조각으로 난도질당해 17개의 봉지에 담겨진 뒤였다. 이 일로 인해 경찰에 대한 신뢰가 또 한 번 나락으로 떨어졌다. 9일 만에 당시 경찰청장까지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야했다. 한창 기대가 모아지던 수사권 조정도 물 건너갔다. 또한 미숙한 신고접수와 초동대응에 대한 강한 질타가 이어졌다. 112접수요원에 대한 교육이 강화되고 전문성 향상을 위해 타 기능과 달리 장기 근무가 가능하도록 개편되었다. 시스템 개선도 병행되어 1년간의 숙고와 연구 끝에 현재 사용하고 있는 전국적으로 통일된 112신고통합시스템이 탄생하였다. 112신고 접수기능의 중요성도 부각되었다. 112종합상황실이 독립된 과로 개편되고 관리자 직급도 상향되었다. 전에 비해 권한이 강화되고 그에 따른 책임도 무거워졌다. 그야말로 아픈 만큼 성숙해진 것이다. 안타깝지만 한 여인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성과이다.     


  당시 피해여성은 1km를 넘는 길을 걸어서 귀가하였다고 한다. 휴일에 마을버스가 일찍 끊긴데다 택시비라도 아끼느라고 어두운 밤길을 그렇게 걸어 다녔다. 밥값을 아껴서 동생 용돈을 챙겼다고 한다. 어려운 형편이지만 공부에 대한 꿈도 잊지 않는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런 여인이 그리 끔찍한 변을 당하였으니 더욱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비극이 재현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원춘이 조선족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조선족에 대한 혐오도 들끓었다. 공교롭게도 그 얼마 전 조선족을 소재로 한 영화가 흥행에 성공을 했었다. 영화 속 무시무시하고 잔인한 캐릭터와 섬뜩한 장면들이 본 사건과 오버랩 되면서 조선족에 대한 반감과 혐오는 극에 달했다. 그 덕분에 선량하고 무고한 대다수의 조선족들까지 한동안 죄진 듯 숨죽여 다녀야 했다.     


  몇 년 전 강남역 화장실에서 여대생이 살해되었다. 당시 범인은 여대생과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고 피해자를 살해할만한 별다른 동기도 없었다. 일명 조현병 환자에 의한 묻지마 살인으로 결론이 나는 듯싶었다. 그런데 한 젊은 여성의 생명이 너무 허망하고 덧없이 스러져버려서일까. 전국적으로 애도의 물결이 거세게 일었다. 하얀 국화꽃뿐만이 아니라 여성혐오에 의한 범죄라는 주장이 벽면을 도매하고 분노에 찬 성토가 거리를 메웠다. 정신질환에 의한 범죄가 전 여성에 대한 젠더폭력으로 둔갑하고 나아가 일부에서는 남성 혐오로 발전하는 기류도 형성되었다.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일부의 일탈로 그 무리 전체를 싸잡아 비난하는 건 다분히 감정적이고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다. 피해 여성에 대한 슬픔과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밑도 끝도 없는 혐오는 피해여성이나 유가족들도 바라는 바는 아닐 것이다. 현장에서 범죄에 대처하거나 이를 지켜보는 주변인 모두가 성숙해지기를 피해여성들은 저 멀리 범죄 없는 세상에서 간절히 바라고 있지는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04화 위치추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