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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라 Aug 18. 2019

세상 모든 일이 내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구나

몬테풀치아노(Montepulciano)

     마음 같아서는 해가 지기를 기다려 성 프란체스코 성당 뒤로 펼쳐질 석양을 감상하고 싶지만 밤 운전이 익숙하지 않아 마음이 조급해졌다. 차가 주차되어 있는 산타 키아라 성당 쪽으로 되돌아 가는 길이 멀고 험란하게 느껴진다. 대성당 사이를 오가는 왕복 40분 정도의 길이 별 것 아닌 사람도 많겠지만 오르막 내리막이 번갈아 이어지고 특히나 걷기에 취약한 나는 쉽게 지쳤다.

     다양한 야채를 섞어 갈아 에너지를 준다는 주스를 홀린 듯 사서 마시면서 잠시 다리를 쉬었다. ‘아까 보았던 연로한 수녀님들은 이 길을 어떻게 걸어오셨을까?’ 싶었다. 나에게는 두 성당 사이를 왕복해서 걷는 것조차 버거웠다. 경사진 길을 걸으니 발목이 시큰해서 순례의 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는 기회였던 셈이다. (산티아고 순례길 걷기는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체력이다.)


     돌아가는 길은 정확히 지는 해를 바라보는 방향이다. 내가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매 순간 깨닫는다. 선글라스를 껴도 햇살이 내 눈으로 바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처럼 눈이 부시다. 언덕 아래에 있을 때는 해가 넘어간 듯하다가 오르막을 오르면 어김없이 해가 다시 나타나 내 눈을 괴롭힌다. 대략 선에 맞춰 차를 몰고 있다는 느낌이 들자 내가 아무것도 안 보이는 만큼 남들 눈에도 내가 안보이겠구나 싶어 덜컥 겁이 난다.


     어서 넘어갔으면 싶은 해는 계속 서쪽으로 이동해서인지 쉽게 지지 않았다. 인생의 고난은 상대성이론으로도 쉽게 납득되지 않을 만큼 길게 이어진다. 오늘의 지지 않는 해가 그랬고, 심장이 두근거리도록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를 주는 다양한 이벤트로) 나를 고달프게 했던 수련의 기간이 그랬다. 더는 보고 싶지 않았던 관계는 버겁도록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았고, 고맙고 소중한 인연은 내가 지속적으로 마음을 쓰고 노력하지 않으면 속절없이 멀어졌다. 물론 영영 끝날 것 같지 않았던 불합리의 시간들도 결국은 끝이 났고, 멀어진 인연들만큼 새로운 관계들이 고맙게 채워졌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언젠가 끝날 일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나 자신을 잃지 않고 희망적인 마음을 가지는 일이 쉽지 않았다.



     몬테풀치아노(Montepulciano)에 도착하고 보니 사방이 어두워져 마을 구경도 못하고 작은 성당 옆에 차를 세우고 바로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Ristorante la Grotta는 저택의 응접실에 들어온 것처럼 안락한 느낌을 주는 꽤 규모 있는 레스토랑이었다. 이탈리아 중부지방에 왔으니 제대로 된 티본스테이크를 먹어봐야 할 것 같은 사명감에 휩싸였다. 전형적인 투스칸식 스테이크(Typical Tuscan Steak)라고 써진 티본스테이크는 100g당 가격이 써져 있어서 크게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대인 것 같지만 사실 레스토랑에서 이미 잘라 준비해놓은 고기 한 덩어리의 무게가 정해져 있어 (보통 최소 1kg) 3-4인은 되어야 시도해 볼만한 양이다. (물론 평소에 스테이크 한 덩이 정도는 너끈히 해치우는 소화력과 강한 턱이 있다면 다르겠지만)

     운전의 피로를 풀 겸 느긋이 기다리며 주변 테이블을 구경한다. 겉은 그을릴 정도로 구웠어도 썰기 시작하면 금세 핏물이 나오는 엄청난 두께의 고기에 슬슬 긴장이 되기 시작한다. 스테이크가 나오면 한번 확인을 시켜주고 옆에서 크게 썰어서 준비해주었다. 우리의 스테이크도 두텁고 육즙을 가득 품은 위용을 뽐내며 테이블 위에 도착했다. 고기를 한 조각 앞 접시에 덜어와 썰어본다. 한국처럼 다른 스테이크 소스는 주지 않고 사이드로는 토스카나 전통식이라는 흰 강낭콩을 삶아 주었다. (함께 먹으라고 줘서 시도해 보았지만 내 입에서는 고기는 고기요 콩은 콩이로다 라는 느낌이라 둘의 조화가 썩 훌륭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마블링이 거의 없는 붉은 소고기를 굵게 썰어 익혀낸 스테이크를 육즙을 즐기며 포식하기 위해서는 (스테이크를 미디엄 레어로 구웠다 할지라도) 튼튼한 턱관절이 필수적이다. 알베르토가 [이탈리아의 사생활]에서 ‘천연 재료의 맛을 그대로 느끼는 것 그게 이탈리아 사람들이 모든 음식에서 제1의 기준으로 삼는 철학이다’고 했는데 (이것이 내가 이탈리아 요리를 좋아하는 이유이지만) 이탈리아 티본스테이크의 천연의 맛을 즐기기에는 내 턱이 너무 약했다. 한 조각은 행복하고 맛있게 음미했지만 두 번째 조각에서부터 턱이 과로하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오다 보니 스테이크로 배부르게 먹기는 불가능했다. 눈앞에 고운 빛깔의 스테이크가 남아 있는데 더는 먹을 수 없는 슬픔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짙은 어둠이 내린 밤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거리상으로는 3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지만 길의 절반이 산속 좁은 비포장 도로였다. 이 길을 알고 있는 구글 지도도 놀랍고 평소에 마을 사람들이 불편 없이 쓴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굽이굽이 이어지는 경사도 있는 헤어핀 구간(그것도 비포장!)을 오르고 내리며 좁은 산길을 상향등과 네비게이션 지도의 길 모양에 의존해 달린다. 좌우는 너무 캄캄해서 무엇이 있는지 식별도 되지 않는다. 타닥타닥 자갈 튀는 소리와 스륵스륵 유리창을 두들기는 나뭇가지 소리가 간혹 들린다.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킨다. 길 옆으로 오늘 아침에 실컷 본 토스카나의 평원이 울렁울렁 펼쳐져 있을 거라고 상상했다. '나는 지금 포도밭이나 밀밭을 가로지르고 있는 거야, 결코 이 길 바로 옆이 낭떠리지일리 없다...'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되뇌며 씩씩하게 차를 몰았다. 차라리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더 다행일지 모른다 생각하니 ‘원효대사가 마신 해골에 담긴 물’ 이야기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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