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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늬 Apr 10. 2020

2. 돈을 벌면 '진짜'가 갖고 싶어

소모재 말고, 기왕이면 나한테 오래 남는 것.

회사원이 됐다. 돈을 벌기 시작했다. 이 두 가지의 평범한 명제는 그 이전과 이후의 내 삶을 송두리째 뒤바꾸어 놓았다. 금요일 저녁, 술 한 잔 걸치고 돈 쓰기 좋은 오늘은 '사고 싶어 지는 마음'에 대해 이야기해볼 참이다.



살기 위해 쓰는 돈은 소비가 아니다


돈 이야기를 하기 앞서, 나의 관점에서 ‘소비’의 정의를 잠깐 정리하고 넘어갈까 한다. 나는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지출은 ‘소비’라고 하지 않는다. 그건 그냥 물속에서 숨 쉬려면 당연히 있어야 하는 아가미 같은 거니까. 가령 매달 내야 하는 월세와 공과금, 생필품과 장을 보는데 들어가는 돈 말이다. 이런 걸 소비라고 생각하면 삶이 너무 고달파진다.


그러니까, 내게 있어 소비라는 건 참을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선택지가 있는 지출을 의미한다. 사는 게 지루할 때 사는 술, 길을 걷다 발견한 멋진 인테리어 소품, 있어도 딱히 자랑하러 다닐 곳은 없지만 자꾸만 눈에 아른거리는 가죽 가방 같은 것들. 아래부터 이 글에서 내내 등장할 ‘소비’라는 단어는 어디까지나 생존의 영역 밖에 있는 지출을 뜻한다.



돈을 벌어봐야 보이는, 소비의 '차원'


소비의 형태에도 차원이 있다면, 학생 때의 소비는 1차원, 멀리 가도 2차원을 넘지 못했다. 돈을 지불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결정짓는 기준은 대체로 ‘가성비’였고, 거기에 가끔 운이 좋으면 나의 취향이 끼어들 수 있었다. 열 번 중 한 번 정도. 즉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있으면 일단 그중 가장 싼 것을 사는 것이 성공한 소비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싼 것들은 그만큼 빨리 낡고, 빨리 유치해진다. 싸게 산만큼 빨리 보내야 하는 물건들을 사고, 금방 버리고, 다시 사거나 그마저도 사지 못해 꾹 참는 일상. 그때는 그냥 돈을 ‘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가지고 싶은 무언가가 생겼을 때 그것을 ‘지금’ ‘살 수 있느냐 없느냐’가 자존감의 고락을 결정지었다.


소비의 함수에서 가성비가 x축, 취향이 y 축이라면, 회사원이 되고 난 후의 함수에는 거기에 무수한 종류의 z 축이 생겨났다. 이제 매대와 쇼케이스에 놓인 상품들은 싸다는 이유만으로 손쉽게 내 지갑을 털어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제 쇼핑하는 나에게 중요한 것은 단순히 내가 살 수 있는 값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돈을 쓰는 대상, 즉 ‘무엇에 돈을 쓰느냐’가 되었기 때문이다.


같은 제품군이라도 어떤 브랜드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는지, 필요하면 약간의 돈이 들더라도 브랜드가 직접 운영하는 곳에서 A/S를 받을 수 있는 제품인지, 등등등… 돈을 쓰는 것은 전보다 훨씬 쉬워졌는데, 쓰기까지 고민하는 시간이 학생 때보다 더 길어지고 말았다. 3차원의 구를 넘어, 차원을 가늠할 수 없는 형태가 될 때까지 생각의 축들이 뻗다 보면 어느 순간 모든 판단이 영점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다.



나를 소비하고 싶게 만드는 욕망들


그래 봤자 월급쟁이 살림에, 내가 긁을 수 있는 신용카드 한도는 사실 빤하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과 그다지 다르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 둘씩 내 것이 생기는 경험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더 질 좋은 것, 더 비싼 것을 사고 싶어 진다.


왜 그럴까? ‘돈 있으면 좋은 거 사고 싶어 지는 게 당연하지’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그 당연한 욕망의 뒷면이다. 같은 돈을 쓰더라도 무엇이 나에게 ‘더’ 쓰고 싶게 만드냐는 것. 견물생심인 건 무릇 인간의 공통된 욕망이지만, 그 욕망을 구성하는 성분은 사람마다 다를 거라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 세 가지 정도의 감정이 비싼 것을 욕심내게 만든다. 첫째, ‘쿨’하고 세련된 브랜드가 가진 이미지를 내게 입히고 싶은 욕망. 둘째, 회사에서 알게 모르게 소비 수준에 따라 나뉘는 대화로부터 도태되고 싶지 않다는 불안감. 그리고 셋째. 회사 생활에 적응할수록 숙명처럼 따라오는 허망함. 읽으면서 예상했겠지만 오늘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룰 감정은 세 번째인 ‘허망함’이다.



자꾸만 허전한 이유: 내가 한 노동은 내게 남지 않아, 모두 사라져


이것은 일하는 '나'를 구성하고 있는 것 중에 '나' 혹은 '내 것'이라고 온전히 부를 수 있는 것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언젠가, 누군가가 회사생활을 전세에 비유한 농담을 들은 적이 있다. 회사란 집으로 치면 매입 부동산이 아니라 전세살이와 같다고. 계약된 기간 동안 머물고 정을 주지만 궁극적으로 내 것이 아니기에 시간이 지나면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회사에 있는 내 책상과 의자, 컴퓨터는 회사의 것이다. 기본적으로 회사가 (빌려) 준 자리에 앉아 공들여 만들어내는 일의 산출물은 클라이언트(광고주) 혹은 회사의 것으로 환원된다. 그러므로 매달 내가 받는 급여는 내 노동에 대한 값이 아니라, 그들에게 제공하는 시간에 대한 값인 셈이다.


나는 나의 일을 소유할 수 없다. 내가 그 일을 했다는 ‘기록’만이 포트폴리오의 형태로 남을 뿐이다. 누구도 시키지 않은 야근을 해가며 완성한 기사가 발행되고 나면 견딜 수 없이 차오르던 감정. 그것의 정체는 외로움이었다. 내 하루의 8할이 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 일상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그것으로부터 나는 매일 소외되어 있었다. 노동의 결과물을 오롯이 독차지할 수 있는 길은 예술가가 되는 것뿐이다.


내가 하는 일과 월급은 영영 등가 가치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그제야 ‘내 눈에 보기에 안 예뻐도’ 돈 주는 사람의 입맛에 맞춰 고쳐져야 하는 것이 일의 본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만든 콘텐츠를 사들이는 이들의 감각(주관)이 얼마나 구린지 따위의 가치판단은 애초 아무 의미가 없었던 거다. 회사원으로 계속 살 수 있으려면 회사와 일을 지나치게 사랑하지 않아야 했다. 출근과 퇴근을 반복한다는 건 결국 떠나야 할 집이라는 마음으로, 보내야 할 자식이라는 마음으로 매일 나를 달래는 수련이었다.



그래서 기왕이면 비싸고 좋은 거 사고 싶어, 최대한 오래 남는 것 말이야


지독한 유물론자인 나는 손에 쥘 수 없는 내 일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꽤 자주 괴롭다. 그래서 비싼 것을 사들이고 싶어 진다. 비싼 것은 대체로 ‘튼튼’ 하기 때문이다. 튼튼한 것들은 시간이 지나도 나와 함께 늙어갈 뿐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일할 때의 외로움이 몸서리쳐지도록 싫어, 보내야 할 때를 예감하며 품지 않아도 되는 모든 것, 오롯이 내 것으로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매일 욕망한다.


… 요즘은 가끔씩 나의 소비 수준이 내가 살고 있는 시간의 몸값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월급은 노동의 대가라기보다 내가 회사에 지불한 시간의 값어치에 가까우니까. 남들과 똑같이 일해도 회사에 더 많은 돈을 벌어다 줄 수 있는, ‘비싼’ 시간을 가진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는 조바심. 그래야 조금이라도 나와 내 일 사이의 간극을 좁힐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면 1평 남짓한 사무실 내 책상이 꼭 섬처럼 느껴진다. 어느 쪽 바다로 몸을 던져도 내가 원하는 뭍으로 헤엄쳐 닿기엔 너무나 먼, 망망대해에 떠 있는 섬.


그래도 나는 다시 월요일이 오면 그 섬으로 출근할 것이다. 닿을 수 없을지라도 노동해야 살 수 있으니까. 내 곁에서 사라지지 않는, 아주 비싼 것, 아주 튼튼한 것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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