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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늬 Nov 02. 2023

나의 굽음병 일기 - 그대로 멈춰라

겨울 횡단보도가 두려운 이유

돌이켜보면 그것은 꽤 이전부터 익숙한 통증이었다. 걷다가 뛰기 시작했을 때, 순간적으로 무릎 밑이 쨍! 하고 욱신거리며 다리 근육이 얼얼해지는 현상. 예상치 못하게 발견한 파란불을 따라 급하게 횡단보도를 건너다보면 꼭 한 번씩 그 통증을 경험하곤 했다. 체감상 날씨가 추워지면 무릎 쪽이 더 뻣뻣해지는 느낌이 들어서 최근 2~3년 사이 한파경보가 뜨는 겨울날은 외출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다.


그날, 아마도 카페에서 저녁이 되도록 일을 하고 집에 돌아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나는 몰아치는 한파에 롱패딩으로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일하던 카페에서 집까지의 거리는 버스나 지하철을 타기엔 도보 15분 정도로 가까웠고, 오랜 시간 앉아 무거워진 다리를 움직일 겸 걸어서 집 근처 큰 사거리까지 이동했다. 횡단보도까지 20m 정도 남았을까,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었고 사람들이 건너기 시작했다. 밖이 너무 추웠기에 나 역시 얼른 그들 틈으로 합류하고자 뛰기 시작했다.


한 발, 두 발, 세 발... 무언가 잘못되고 있었다.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다리가 얼어붙었다. 저 밑에서부터 실시간으로 근육이 굳는 느낌을 혹시 아는지? 마치 겨울왕국 엘사 공주의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점점 굳던 내 다리는 횡단보도 중간을 건넜을 때 완전히 멈추고 말았다.


어?
왜 안 걸어지지?


그 짧은 찰나가 갑자기 슬로모션 영상처럼 분할되기 시작했다. 신호는 얼마 남지 않았고, 퇴근길 교차로의 성난 차들은 자비 없이 내달릴 태세를 마치고 있었다. 보행기를 잃어버린 고령의 노인처럼 횡단보도 한가운데 멈춰 서 버린 나를 어떻게 저 반대편 보도블록 위로 데려갈 것인가. 얼음, 땡, 을 외치자 경직이 사라지는 마법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필사적으로 다리를 끌기 시작했다. 두 다리 중 한쪽의 감각이 그래도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굳었던 왼쪽 다리의 관절마디는 지금도 통증이 강하게 올라오는 지점 중 하나다.)


다행히 빨간 불이 바뀌기 전에 나는 보도블록 위에 도착했고, 안도의 식은땀을 흘리는 내 등 뒤론 차들이 달리며 날카로운 바람이 일었다. 그  어떻게 집까지 돌아왔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의 경험 이후, 내가 가진 병에 대해 얼추 알게 된 지금도 나는 겨울이 두렵다. 그러거나 말거나, 올해도 겨울이 오고 있네.


아니 준비 안됐어 오지마 / =왕좌의게임


사실 그 무렵 나의 증상은 최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수시로 전신에 열이 올랐고, 아침에 눈을 뜨면 '조조강직', 즉 말초 관절(특히 양쪽 손가락) 마디마디가 퉁퉁 부어올라 손이 곱아버리곤 했다. 밤에는 모든 뼈마디가(특히 하체와 어깨) 욱신거리는 통증 때문에 새벽에 수시로 깨야했고, 염증 때문에 쉽게 피로가 몰려와 자주 침대에 누워야 했다. 조조강직과 염증이 양쪽 손에 동시에 생긴 날은 홀로 머리를 감거나 밥을 차려 먹을 수 없었다.


매일 새롭게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너무 많은 것을 시기 질투하며 살았고, 너무 많은 사람을 증오하고 저주하며 산 대가로 남들보다 10 곱절의 속도로 늙는 벌을 받는 거라고. 20대의 몸, 80대의 관절. 이 비정상적인 노화의 저주를 벌이 아니면 뭐라고 설명할 수 있겠어.


한순간에 백발 할매가 돼 버린 소피의 마음이랄까. / =하울의움직이는성


병명을 찾기 위해 쓸데없는 병원들을 여럿 전전하며 길바닥에 돈을 뿌리고 다녔다. 곰의 앞발처럼 퉁퉁 부어오른 손에 별다른 효과도 없는 각종 물리치료를 받고 돌아오는 날이면 그만 살고 싶어지곤 했다. 현대인의 직업이 대개 그렇지만, 나는 직업 특성상 키보드로 원고를 써야 밥을 벌어먹는 인간인데. 만약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다면.


아무리 올려도 듣지 않는 진통제를 삼키며 어쩌면  의지와 상관없이 책상 앞에 앉지 못하는 여생을 보낼 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들었다. 바보 같게도 그 생각을 하니 억울하더라. 사실 나는 언제나 글쓰기가 싫었다. 늘 일이었기 때문에 별로 즐겁지가 않았거든. 그런데도 고작 하나 있는 나의 잡기(雜技)를 병으로 잃게 된다는 상상을 하니 어찌나 좌절스럽던지.


결론적으로 지금은 약으로 증상 조절을 할 수 있게 되어 이렇게 글을 쓰고 있지만, '전문적으로 쓰지 않는 삶'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유효하다. 약으로 조절이 되고 있어도, 나는 점점 오래 한 자리에 서거나 앉아서, 손으로 물건을 다듬거나 타자를 치는 업무가 어려워질 것이다. 왜냐하면 내게는 아주 가까이에, 이 병의 미래를 보여주는 인물이 있기 때문이다. 그게 누구냐.


내 어머니다.


그럼 나는 어떻게 엄마와 같은(정확히는 유사한) 병을 얻게 되었을까? 정확한 이유는 의사도 모른다. 원래 이 병은 유전 확률이 매우 희박하기 때문이지. 굳이 그 희박한 확률에 내가 걸려들었다는 식의 짠내 나는 주장은 하고 싶지 않고, 다만 그녀가 살아온 삶의 궤적과 나의 유소년기-청년기 사이에 잠재돼 있던 발병 인자를 활성화할만한 공통적인 무언가(trigger)가 있었다고 추정해 볼 뿐이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아마 당신은 바로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그리고 내 병이 내 어머니의 것과 같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궁금할 것이다.


맞다. 이제 그 이야기를 해볼 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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