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살에 굳이 혼자 유럽여행 #4
“그럼 오늘 저녁에 같이 밥 먹을래요? 친구들이랑 같이 우리집에서 파티를 하는데, 올 수 있어요? 집은 이 근처예요”
독특한 영국식 영어 액센트가 강한 그 사람이 말했다.
“………............”
연한 회색과 핑크빛이 감도는 핏이 좋은 셔츠에 군더더기 없이 몸에 잘 맞는 슬랙스를 입고, 말끔하게 정리된 머리칼을 가진.누가봐도 호감형인 남자.
더블린에 도착한 후, 숙소에서 나와 발길 가는데로 걷다보니, 어느새 번화한 골목이었다.
잘 꾸며진 레스토랑과 까페들은 바쁜 점심시간을 보내고 다가올 저녁시간을 준비하는 듯, 조금은 여유있어 보였다.
한끼도 제대로 먹지 못했던 터라, '뭐 먹지..'라는 생각으로 레스토랑 하나하나 유심히 바라보며 천천히 걷던 나는,
‘나 시간 많은 관광객 여자예요’라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을 거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맛있겠지? 여기 맛있는 집이야. 나랑 같이 점심 먹을래?”라며 말을 걸어왔다.
그 남자는 예의 가득한 호의적인 영국식 영어로 흠칫 놀란 나에게 이야기 했다.
“ 미안해.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어. 나도 아직 점심 먹기 전이고, 너는 점심을 먹고 싶어 하는 것 같고, 그래서 같이 점심 먹으면 어떨까 했어” 라며, 자기 이름을 말해주고 나에게 인사를 했다.
나도 모르게 바로 튀어 나온 대답은
“I’m not hungry”.
물론 밥을 먹을 예정이었지만, 지금 일어난 이 상황이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배고프지 않다는 나의 답변에 그는 뭐라고 계속 이야기 하며 내 옆에 서서 걸었고 배고프지 않다면 같이 까페가서 커피마실거냐 물었지만, 난 그냥 걷고 싶어서 걷고 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자기 집으로 저녁먹으로 오라며 묻고 있는 이 남자.
‘나를 언제 봤다고 오라 마라야.?’ 갑자기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잠시 침묵했다.
솔직히, 호감형 얼굴에 영국식 영어 액센트, 말끔한 옷차림까지.
왠만하면 “yes” 가 나올법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나이 마흔이 되어 큰맘먹고 온 혼자여행에서 호감형 청년에게 적극적인 작업을 당한? 이 비현실적인 상황에 취한 것도 잠시 정신을 바짝 차렸다.
“저기요. 난 너랑 같이 저녁먹을 생각도 없는데다가 너랑 같이 걸으면서 이야기 하는 것도 불편해. 미안 한데, 방해하지 말아줄래? 나 혼자 걷고 싶다니까. “ 내가 생각해도 좀 쿨하고 예의없이 직설화법 구사하며 내 의견을 피력하니, 그 호감형 오빠는 미안하다며 자기가 실수했다고 사과하고는 사라졌다.
솔직히 말해서 이번 혼자여행이, 내 ‘마흔여행’이 아니었다면, 그 오빠를 따라 갔을지 어떻게 알겠냐만은, 아이들 울고불고 겨우 떨어져서,자아 좀 찾겠다고 와 있는 이곳에서, 어린 남자애랑 희희낙낙거리며, 내 아이들과 남편을 무시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고, 그렇게 칼같은 대답으로 잘생긴 남자에게 “no”를 건내는 나는, 더 멋진 여자가 되었다.
“쏴라있네~ 류미연”
은근 어깨가 으쓱했다.
삼형제 엄마이기전에, 여자 류미연이 된것 같은 기분이 들며 의도치 않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준, 정체불명의 그 남자에게 감사했다. 아이들 주렁주렁 매달고, 늘 편안한 옷차림으로 다닐 땐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일을 경험하고 나니, 아줌마들이 왜 막장드라마를 좋아하는지 대충 알 것도 같았다.
삶은 달걀 같은 인생에, 톡 쏘는 시원한 사이다 한컵 마시듯 막장드라마의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며, 활력을 얻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블린에 도착하자마자 자칫, 막장드라마를 찍을 뻔 했지만, 여행오기전 세워둔 두가지 규칙에 의해 막장드라마나 스릴러가 아닌 가족 모험 영화로 마무리 한 것에 대해 안도감이 들었다.
혼자 여행의 두가지 규칙.
첫째는 해지기 전에 숙소로 돌아올 것!
두번째는 내가 컨트롤 가능한 상황에서 움직일 것.
원하는 것이 분명할 때, 선택의 방향도 확실해 진다.
대부분의 사건사고는 밤에 일어나기에 안전한 여행을 위해선 밤을 포기하기로 했고
시작부터가 내가 모르는 곳이라는 불리한 입장이기에 이십대에 즐기던 막무가내 모험은 자제 하기로 했다.
스스로 칭찬하며 밑도 끝도 없는 승리감에 심취해서 기분좋게 리피강을 따라 걸었다.
더블린 시가지를 관통하는 리피강 주변으로 많은 사람들이 산책도 하고, 의자에 앉아서 책도 읽고 있다. 혼자이기에 가능한, 아무것도 안하는 여행을 하고 싶었기에 그저 계속 걸으며 사람구경, 새로운 동네 구경에 시간 가는줄 몰랐다.
어느덧 달달하고 알록달록 귀여운 도넛들이 줄지어 나를 부르는 듯한 도넛가게 앞에 멈춰서서, 어느 아이를 데려갈까 잠시 고민한 후, 향이 좋은 커피 한잔과 귀여운 도넛을 들고, 일단 햇볕이 좋은 자리를 찾아서 앉았다.
‘행복하다’.
달콤한 도넛 한입에 첫사랑을 고백하듯, 수줍게 붉어진 얼굴로 리피강을 바라보며 고백했다.
이렇게, 내가 나를 짝사랑하게 놔두지 말고 종종 사랑을 고백해주며 데이트도 하고 나의 행복을 함께 나누는 사이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행복하기 위한 방법은 없다. 행복이 곧 삶의 방법이다.
지금 가진 것에 감사하고 모든 순간을 소중히 쓰다듬고 내안의 나의 이야기에 귀기울여 주며 사는 것.
행복하다 말해주는 순간들을 모아, 나는 점점 더 행복해지기로 했다.
어느덧 시간이 제법 흐르기도 했고, 하루에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난 터라 일찍 들어가 쉬기로했다.
여행경비를 줄이기 위해 게스트 하우스를 이용했다. 리피강 옆에 자리잡은 게스트 하우스는 너무 싸지도 비싸지도 않은 적절한 가격에 나쁘지 않았다.
게스트 하우스가 있는 건물 옆에 펍이 있어서 대낮부터 청춘들로 북적거리며 시끄러운 것만 빼면 나름 만족스러웠다.
개별 샤워실이 있는 여자 4인용의 방이었고, 내 침대는 문에서 가까운 곳의 2층자리였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이층침대로 올라가 일기장을 펼쳤다. 매일, 일기를 쓰겠다는 야심찬 계획으로 노트를 펼치고 적어내려 갔다. 무엇을 먹고, 어디를 갔는지 내 기분은 어땠고 내일은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닥 늦은 시간은 아니었기에, 숙소엔 나 혼자 뿐이었고, 조금이라도 몸을 들척이면 메아리 치듯 삐걱거리는 철제 2층 침대에 누워있으려니, 나의 20대 일본 시절이 떠올랐다. 잃을게 없어서 겁도 없던 나의 20대.
무작정 워킹 홀리데이로 일본에 가서 , 손바닥 만한 싸구려 기숙사 간신히 구해, ‘일단 한달은 잠잘 곳이 있구나’,,하며 느꼈던 그 안정감.
이층 침대 하나, 작은 책상 두개가 겨우 들어가던 그 작은 방에서 그땐 그렇게 행복했었다.
나의 두번째 이십대를 기념하기 위해 혼자 떠나온 여행.
고급 호텔이 아닌, 그저 게스트 하우스.
더구나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자야하는 넓지 않은 방의 이층 침대 위에서, 그 언젠가 느꼈던 비슷한 안정 감이 스르르 스며들었다.
‘좋은 호텔이 아니면 어때. 난 지금 참 좋다.’ 라는 문장을 또박또박 적고 있을 때, 누군가 방에 들어왔다.
정식으로 나의 첫 대화 상대가 된 그녀는, 누가봐도 붙임성 좋은 사람이었다.
자신은 이태리 출신이며, 남편과 폴란드에 살고있고, 혼자서 여행 왔으며, 오늘은 여기저기 그냥 걸으며 돌아다녔고 내일은 골웨이에 갈까 생각 중이라 했다. 거침없이 자기 이야기를 해주는 사교성에, 내가 조금은 살짝 뒤로 물러서긴 했지만, 그녀와 나의 공통분모가 너무 많은 이유로, 금새 긴장감을 늦추게 되었다
그녀는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내가 마흔 여행으로 왔다고 이야기 하자, 그럼 자기가 나이가 더 많겠다고 했기에, 정확히 몇살인지는 모르지만, 보기에도 나보다 나이가 많은 걸 알 수 있었다. 나와 비슷한 처지에 비슷한 또래, 게다가 성격도 참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된게 굉장히 행운이라 생각했다.
자연스레 질끈 묶은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 , 머리색과 같은 갈색의 눈동자는 그녀를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고, 우리는 금새 더블린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조금씩 친해졌다.
오늘이 이틀째 여행인 그녀와, 더블린에서 첫날밤을 맞이하는 나.
우리는, 내일은 함께 골웨이를 가는 것으로 약속을 하고, 잠이 들었다.
잠든지 얼마나 지났을까. 익숙치 않은 언어로 이야기 하는 목소리와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새벽 2시쯤.
창문밖은 펍에서 나온 사람들로 조금은 시끄러웠고, 우리 방의 1층 침대의 청춘들은 아직 들어오질 않은 모양이다.
내일 함께 골웨이에 가기로 했던, 사교성 언니가 침대에 앉았다 일어났다 하며 안절 부절 못하고 있었다.
이탈리아어로 짧은 통화를 여러번 하고 있어서,그냥 참기에는 꽤나 귀에 거슬려 잠을 자기는 힘이 들었다.
자던 잠을 포기하고, 일어나 앉으며, 조금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요.. 지금 좀 늦은 시간인데, 시끄러워서 잠을 못자겠어요”
“나 지금 집에 가야할 거 같아.”
난데없는 그녀의 대답에 어리둥절하며 물었다.
“네? 왜요?”
“…남편이 죽었데”
‘………………………………………’
정말, 순간적으로 내가 꿈을 꾸나? 싶을 만큼 갑자기 머리가 멍해졌다.
멀쩡하던 남편이 왜 갑자기 죽었다는 건지, 정말 그 순간은 이게 무슨 몰래 카메라 같은 건가 하는 생각 이 들 정도로 비현실적이었다.
‘아니..어쩌다가…..아니. 그러니까….어떻해요,..이게 무슨…..아니 그럼 ….”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생각나는 말들을 줄줄이 뱉고 있는 내 입을 막은 건 그녀의 짧은 대답이었다.
“교통사고’
그게 가능한 일인가.?
아니 어떻게 그게 가능한 일인가.?
정말 현실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건가?
이제 알게된지 몇시간 된 나조차도 이렇게 정신이 없는데, 말도 안되는 일을 당한 그녀의 머리는, 심장은, 온몸의 세포하나하나는 지금 어떤 상황일지 상상도 안됬다.
새벽이라 당장 떠나는 비행기가 없어서 발만 동동 거리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녀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어 너무 미안했다.
몇번의 통화 끝에, 겨우 6시쯤의 비행기를 예약 하게된 그녀는, 서둘러 짐을 싸기 시작했고, 공항까지 가는 버스편은 이미 끊긴 시간이라, 택시로 이동하겠다며, 택시를 불렀다.
새벽 3시반쯤.
그렇게 그녀가 떠났다.
여전히 1층 청춘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여전히 창문밖은 펍에서 나온 사람들로 조금은 시끄러웠고, 여전히 나는 2층 침대에 누워있었지만, 여전히 이 모든 상황이 적응이 안되었다.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을 겪은 그녀에게 너무나 미안하지만, 그녀가 떠난 뒤 2층 침대에서 주섬주섬 내려와서 내가 했던 첫번째 일은, 내 짐가방을 체크 하는 거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보았지만, 역시나 아무 이상없는 나의 가방을 보며, 나의 이기적인 마음에 민망해 졌다.
피로가 몰려왔다. 정말 하루가 길다 싶다.
누군가에게는 지극히 평범했을 이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가장 어두운 시간을 지나는 순간이라니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너무나 당연히 내게 올 내일을 위해 눈을 감고 애써 맘을 달래며 잠을 청해본다.
그러다 문득, 그동안 나는 너무나 당연하게 ‘하루’를 받으며 살았구나. 생각했다.
수없이 많았던 씨앗중의 하나였던 내가, 운이 좋게 뿌리를 내렸고, 약하지만 강한 힘으로 나를 덮었던 어두운 땅을 뚫고 싹으로 나와, 더디지만 멈추지 않으며 지금껏 자라나 나무가 되었다.
이제는 온몸으로 잎을 만들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려는 나의 하루는 거저 받는 햇볕과 비처럼, 그저 선물이었구나. 하는 생각에 미치자, 내일부터는 눈을 뜨며 감사해야겠다는 마음이 절로 생겼다.
나의 하루에. 나의 사랑하는 이들의 하루에.
누구에게도 보장되지 않은 내일이라는 것을 누릴 수 있는 행운에.
모든 순간을 감사하고 낭비하지 말아야겠다 생각하며, 펍에서 흘러나온 사람들조차 줄어들어 조용해진 시간.
새벽 5시가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