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방접종실에서 근무한 지 딱 두 달 되었다. 이 전에는 의사와 두 명의 동료 간호사들과 한 팀을 이뤄 환자를 봤다면 지금은 나 혼자 모든 것을 결정하고 책임진다. 내게 가장 중요한 가치인 '주체성'을 가지고 업무 할 수 있어 좋지만그 이상의 책임감이 무겁게느껴질 때도 있다.
물론 이런 사정을 다 알고 도전했고후회는 없다. 예상치 못한 일은 미국 질병통제 예방센터인 CDC 가이드라인을 찾거나의사들에게 물어보고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업무적 문제 이외에 가장 힘든 건 역시 인간관계다.특히 막무가내인 환자들을 대응할때 적잖이 마음고생을 하는 편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예방접종실은 예약을 받는 시스템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의도 면적의 5배 이상에 해당하는 평택 미군기지에 근무하는 미군은 10만 명이 넘는다. 그들의 가족, 부대에 근무하는 미국/한국 시민까지하면 얼마나 많을지 상상도 안된다. 그에 비해 예방접종실 간호사는 두 명뿐이니아무리 손이 빨라도밀려오는 환자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다행히내가 근무를 시작하기 전,예약제로 바뀌었고아무 때나 환자가원한다고 주사를 주지 않는다. 그러나원칙이 있으면예외도 있는 법이다.무조건 당일 접종이 아니면 차질이 생기는 취업, 입학 등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면 업무 외 시간을 내어 주사를 준다.하지만 무례하고 막무가내로 우기는 환자에게는 단호하게 'No'라고 말한다.
어느 날 오전 업무를 시작하자마자,서너 살쯤 되는 올망졸망한 아이셋을 데리고 온 엄마가 있었다. 엄마혼자 아이 셋을보는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세 아이 중 쌍둥이 두 명만오후 1시 40분예약이었지만 엄마상황을 고려해 아침에 봐주기로 했다. "좋은 아침이야"라는 인사도 무시한 채 그녀는 이렇게 물었다.
"오늘은 세 아이 중 두 명만 예약을 했는데 나랑 나머지 딸도 독감주사를 맞을 수 있어?"
"미안하지만 예약을 하지 않았으면 주사를 줄 수가 없어.병원 규칙이라 어쩔 수가 없네.'혹시.."
"Fuck"
나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말했다.'잘못 들었을 거야.' 나는 심장이 벌렁거릴 정도로 놀랐지만무심하게 못 들은 것처럼주사를 준비했다. 이 모습을 보던 한 아이가갑자기울음을 터트리고 나머지 아이들이 따라 울기 시작했다.
예방접종실에서 매일 볼 수 있는 흔한 광경이다. 하지만아이들의 울음소리보다 더 크게 울려 퍼진 엄마의 고함소리에 나는 또 한 번 가슴이벌렁거렸다. "이거 보라고, 주사 한번 맞을 때마다 이런 x 같은 상황을 반복해야 되는데 이 짓을 또 하라고? Fucking %@$€£》¡x"
이번엔 그녀의 이야기를 정확히 들었지만 나는 그 요청을 거절했다.화가 난 그녀는 잘 가라는 인사도 하기 전진료실을 박차고 나갔다. 무례한 환자의 요구에 응하지 않은 이유는 예외를 두지 않아도 되는 상황으로 판단했고 그렇다면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는 걸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안된다'라는 말로 환자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쿠션어> 무언가를 부탁하거나 부정적인 말을 해야 할 경우 좀 더 부드럽게 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말을 가리킨다. ‘괜찮으시다면’, ‘실례지만', '죄송하지만', '바쁘시겠지만' 등이 이에 해당한다. -지식백과
어떻게 하면 상대방이 납득할 수 있게 현명하게 거절할 수 있을까? 거절하기 전 쿠션어를 사용하고 거절 후에는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예를 들어 화가 났던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면 그녀 입장에서 화는 나지만 납득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유감스럽지만 오늘은 예약이 꽉 차서 더 이상 예약을 받을 수 없어. 알다시피 이곳은 예약한 환자에게만 주사를 줄 수 있잖아.대신 네가편하게 올 수 있는 다른 날로 예약을 잡아줄께. 그리고 오늘처럼 내가 잘 도와줄게."
나 역시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이라 관계를 맺는데 어려움이 있지만, 뭐든지 처음이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거절도 처음에는피하고 싶을 정도로 불편했지만 내 스타일에 맞는 적절한 방법을 찾아가는 중이다.거절을 경험하고 자신의 의견을 올바르게 표현할 수 있도록 연습함으로써 건강한 관계를 맺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