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며칠 전에 아는 언니가 한 말 있잖아. “참 많은 시련이 있었는데, 기억이란 필터를 거치면 흐뭇해진다.”
= 그래 맞아. 시련을 겪을 때 내가 이걸 결국 이겨낼 걸 알아. 그래서 너무 짜증 나는 거야. 내가 이걸 이겨낼 줄 알고, 나한테 이런 시련을 주는 것 같아서. 나 감당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 감당하라고 시련 주니까. 나 더 이상 감당 못 하니까 안 줬으면 좋겠는데... 나한테 또 시련 주고, 결국 감당해내고.
저번에 최종면접 떨어지고 일주일 폭풍 오열했던 것도, 이젠 흐뭇해지고, ‘그래 그런 시기가 필요했지...’ 이러고 있어.
기억이란 필터를 거쳐서 또 흐뭇해진다... 그래, 그 말 맞긴 맞는데.. 이제 그만 흐뭇해도 되니까 시련 그만 주면 안 될까?
Q. 왜 갑자기 이런 얘기를 하나?
= 오늘 또 면접 탈락 결과를 받아서지 뭐. 대한민국 20대 중후반 취준생이 우울증 안 걸리는 게 더 신기해. 한두 명 뽑고, 뭐 가끔은 맘에 드는 사람 없다고 안 뽑기도 하거든.
암튼 그 한 두 명이 되려고 몇백 명이 달려들어. 전형은 몇 달에 걸쳐서, 네 단계 이상씩... 서류, 필기, 면접1, 면접2... 결과도 바로바로 나오는 게 아니야. 맘 졸이면서 결과 확인할 때 그 심장 떨리는 느낌... 전체적으로는 합격 확률이 몇백 분의 1이야. 그렇다 보니 탈락 경험이 자꾸 쌓여. 그렇게 맘 졸이면서 결과 확인하길 여러 번, 그러다가 몇십 번씩 거절당한다고 생각해 봐. 불안장애나 우울증 안 생기기가 더 힘들지 않겠어?
그런데 사실 나도, 겪어보기 전까지는 이 정도로 뼈저리게 느끼진 못 했어... 청년 실업 어쩌구 뉴스에서 보면 그냥 기사 하나로 흘려보내던 시절이 있었지 어릴 땐.
Q. 그래 나만의 문제가 아니야. 최악의 실업률이라잖아.
= 그래. 몇백 명 중에 합격한 한두 사례가 특이한 거지, 탈락하는 건 너무도 일상적인 일이야.
그래도 아프고 힘들어.
왜냐? 지원하는 동안엔 그 회사를 정말 가고 싶은 것처럼 환상을 주입해야 하거든. 자소서 항목, 면접 예상 질문을 봐. 환상을 억지로라도 주입하지 않으면 할 수가 없어.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야 그나마.. 그나마 그 아득하고 먼 길에 조금이나마 가까워질 가능성이 생긴다구.
그렇게 그 회사를 너무 가고 싶은 것처럼 환상을 스스로에게 주입해뒀는데, 불합격의 순간, 그 환상이 깨지는 거지.
그리고 면접에서 떨어지면 자꾸 과거의 순간을 되돌려 보게 돼.
지나간 과거니까 그냥 잊으라고? 그러기엔, 실수를 줄여서 다음 기회라도 잡아야 하니까..
탈락 사유는 누구도 알려주지 않아. 그래서 자꾸만 곱씹게 돼. 내가 왜 탈락했을까,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제대로 답변 못 한 게 있으면, 이럴 걸 저럴 걸 하면서 자꾸 후회스럽고. 답변을 퍽 괜찮게 한 것 같으면, 그럼 나 자체가 싫었던 건가? 싶고 그래.
Q. 그래 뭐 지금 당장 해결될 문제는 아니니까. 억울한 거라도 다 쏟아내.
= 부당한 것도 많아. 노트북 사용 가능하다고 고지도 안 해줘놓고, 가져온 사람은 쓸 수 있게 해주더라.
그리고 인사 담당자가 블라인드라고 학교나 친인척 등 유추될 수 있는 거 말하면 실격이라고 신신당부했었거든? 근데 들어가자마자 사장이 “학교 어디 나왔네”부터 말하더라니까.
그런데 이의제기 못 하고 있어. 나는 떨어졌으니까... 탈락자의 열폭으로 보겠지 싶고. 붙은 사람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Q. 그래서 뭐 이제 어쩔 거야? = 몰라. 주변에 떨어졌다고 자꾸 말해야 하는 게 참 송구스럽고. 오늘 폭식했고. 그런데 운동도 했어. 저녁엔 공부도 좀 했다. 그냥 일상 살아가고 있어. 내일은 폭식 안 할 거야. 속이 불편하고, 운동할 때 좀 무겁더라.
아 맞다. 그런데 그거 알아?
탈락한덕(?)에 보물 같은 말들을 참 많이 들었어. 주변 분들이 나를 위로해주신다고 각자의 실패담들을 들려주셨거든. 진솔한 이야기들은 참 힘이 있어. 그 이야기들 덕분에, 나는 다시 일상을 살아갈 힘을 얻었는지도 몰라.
나는 솔직히, 왜 사냐고 묻는다면
사람 때문인 것 같아. 사람들이 있기에 내가 존재하고, 사람들 덕에 울고 웃어. 그게 사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