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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제이 성훈 Nov 12. 2019

<나는 왜 미치도록 영순이가 좋은가?>

영순이와 999일을 만났어요.

영순이는 1순위, 2순위처럼
여자친구가 최우선 순위임을 뜻하는 애칭입니다. 

(제가 잘 못챙겨줄 때는 
삼순이, 사순이라고 화를 내기도 합니다.)

첫만남 후 6일 만에 시작했어요.
<동백꽃 필 무렵>의 황용식이처럼,

'기다 싶으면 가야죠.'

띠동갑이라 도둑놈 소리를 듣습니다.
근데 도둑은, 훔쳐가는 사람이잖아요. 

저는 로빈 훗처럼 영순이에게
비어있던 감정들을 채워주려 합니다.

의적이라 불러주세요.

영순이는 부끄럽지도 않은지
어딜가든 제 이야기를 솔직하게 말하더라구요. 

랩을 하고 있다. 잘생겼다(?) 착하다. 좋다. 

저도 지기 싫어서 공연 중에
2천명 관객 앞에서 외쳤습니다.

'영순아 억수로 사랑한데이'

<누구나 랩> 맨 뒷장에 써놓기도 했습니다.  

'내 사랑 영순위 단비'

sns에도 하도 티를 내니까
이름을 영순이로 알더라구요.

영순이는 본명처럼
반갑고, 달콤한 존재입니다.

단비.
much-needed rain, timely rain, welcome rain.

제 삶에 절실하게 필요했던, 
기가막히게 적절한 순간 나타난 영순이를, 
격렬하게 환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연애보다는 일을 좋아하던 사람, 
상대보다는 제 자신을 더 사랑하던,
나 뿐인 놈이었습니다. 

연애를 시작하고,
삶의 우선순위에 지각변동이 일어났어요.

나보다 영순이의 행복이 먼저이길,
내 존재를 덜어내더라도 함께 하는 삶이길.

해일과 같은 시련들도 많았습니다. 

연애와 인간심리를 정말 잘 묘사하는 작가, 
알랭드 보통은 강연에서 이런 농담을 합니다. 

200년 정도 후 미래에는 데이트를 할때 
각자가 쓴 책을 교환한다는 것입니다.  

그 책의 제목은
<나는 누구인가> 또는 <내가 얼마나 미쳤는가?>

그 책을 읽으면서 서로에게 말하는 거죠. 
'아 당신은 성관계에 두려움이 있군요.'
'오 당신은 경제적으로 걱정이 많군요.'

남자와 여자는 살던 행성이 다르듯,
이성과 감정의 활용방식도 매우 다르더라고요.

치킨 때문에 싸운 적이 있습니다.

서비스업에서 일하는 영순이가,
3년만에 맞이한 크리스마스 이브 휴일이었습니다. 

영순이가 저를 기다리고 있었고,
치킨은 30분 전에 이미 도착했습니다. 

밤 11시 20분. 저의 퇴근이 늦었습니다.
기다리다 지쳤던 영순이는 말합니다. 

'그냥 내일 먹을까?' 

저는 적어도 다음과 같이 말했어야 합니다..

'무슨 말이야. 기다려줘서 고마워.
족발이나 닭발도 더 시켜서 먹자'

하지만 연애 일자무식 까막눈이였던 저는
'그럴까? 그게 좋겠지?' 라고 답해버립니다. 

다음 순간 치킨이 공중을 날아다니고,
분노한 영순이는 눈물을 흘리며 소리 질렀습니다.

'평범하고 싶었던 거 뿐이야!!!!!' 

특별한 날, 촛불은 못 붙여도
그 바람만은 함부로 꺼뜨려선 안되는 거였어요.

저는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편이고, 
영순이는 물아일체가 되는 사람입니다. 

영순이가 직장에서 싫은 소리를 들었다면 
'그 사람 완전 꼰대네, 아무 걱정하지마'
라고 하면 될 것을 

'아 그건 자기가 가지고 있는 피해의식이야. 
어차피 별일 아니니까 자기가 그냥 양보해.' 
라고 저주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눈물을 보이기 전으로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영순아 회사에서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니 너무 속상하다. 근데 난 무조건 자기 편이고, 영순이는 사랑받고, 존중 받아야할 존재야.'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영순이는 애정을 자주 확인하곤 했어요.
'나 사랑해?' 하고 불안한 마음을 내보였어요. 

사실 그 말을 들을 땐, 힘들기도 했어요. 
100을 채웠는데 0으로 리셋이 되는 기분이었죠. 

하지만 지금은 나 사랑해? 그 말을 '나 너 사랑해'로 해석합니다. 

'나 너 사랑하는데 지금 좀 불안해' 하고 말이죠.
영순이가 불안한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내 눈빛, 말투, 문자, 작고 세심한 모든 순간 영순이가
사랑 받고 있다는 걸 알려줘야겠다',라고 다짐합니다.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 또는 <내가 얼마나 미쳤는가?>라는 책을 연애를 통해 적어가고 있습니다. 

매일 만났고,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서로의 가정사와 흑역사를 공유했습니다.

성격 유형 검사를 했고,
개별적으로 심리 상담을 받았고, 
커플 심리 상담도 받을 계획입니다. 

3년 가까이 연애를 해본 건 처음입니다.
여자 분들이 먹는 걸 그렇게나 좋아하는지 몰랐고, 
감정의 공유를 중시한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솔로 시절엔 연애하는 분들이 그저 부러웠는데요. 
이제는 커플인 분들이 측은하게 느껴질 때도 많습니다. 

어깨를 토닥거려주고 싶어요. 
그리고 책을 꼭 써보시면 좋겠어요.

'상대가 언젠가 떠나리라는 불안증이 있다.
우울할 땐 혼자 있을 시간이 1시간은 필요하다.'
등의 내용을 담아서요.

저는 올해 3월 5일 홍콩 디즈니랜드 곰돌이 푸우 꿀단지 놀이기구 안에서 영순이에게 프로포즈를 했어요. 
 
'난 많은 시간을 아꼈네. 이번 내 생애 내 반쪽을 찾았으니. 너 혼자 못 뚫던 귀걸이 양쪽 귀에 반짝여. 함께면 생겨나 용기.
난 많은 시간을 아꼈네. 이번 내 생애 내 반쪽을 찾았으니. infinity. all the time. 넌 나의 영순이. 영원에 영원을 곱해.'

영상으로 찍어둔 노랫말에 맞춰서
무한대 모양 목걸이를 선물했어요

근데 결혼은 아직 못했습니다. 

여차저차해서 연애를 좀 더 하기로 했습니다. 
결혼보다 중요한 건 함께 살아갈 과정이겠지요. 

영순이에게 반했던 순간을 떠올려 봤습니다. 

어느 날 저희 집에 생수가 다 떨어졌고, 
몸살에 걸린 저대신 영순이가 물을 사오겠대요.

한참이 지나도 안와서 나가봤더니,
6개 한묶음 2리터 생수를 양손에 들고 오는거에요.
낑낑 거리면서요. 엄청 무겁고 손이 아팠을 텐데..

자기 자신의 한계치를 넘어
저를 챙기려는 마음이 보였습니다.  

돌아보니 영순이는,
항상 제 가장 가까이서 숨처럼 저를 살려줬고
작은 일에도 돌고래처럼 기뻐했습니다. 

그런 영순이와 함께한 모든 순간이 고맙습니다.  

가장 보통의 존재인 저는 
<내가 얼마나 미쳤는가> 뿐만 아니라 
<상대가 왜 미치도록 좋은지>도 적어보고 있습니다. 

연애는 정말 어렵지만 - 
삶의 우선순위를 조율하고,
자신의 취약한 심리상태를 인정하고,
내 짝의 매력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영순이는 예쁩니다. 울음을 터뜨릴 때조차도 예쁩니다. 
하지만 영순이가 우는 모습을 보는 저는 못생겼습니다.

그녀가 웃을 수 있도록, 그 이유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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