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듄: 파트2’를 두 번 보고 확신했다. 「듄」을 드니 빌너브가 영화화한 건 필연이지 않았을까. 이야기 소재, 구조에 대한 고찰이 그의 다른 영화들과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발단-위기에서 끝나 목말랐던 파트 1의 아쉬움을 해소해 주었다. 세계와 이야기도 적절하게 확장됐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컨택트’ 등 전작의 탁월한 연출력에 비하면 아쉬웠지만, 그래도 빌너브와 제작진의 뚝뚝한 야심과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영화는 전편의 마지막 장면에서 곧바로 이어진다. 10191년 미래, 물이 가득한 행성 칼라단을 지배하던 아트레이데스 가문은 무기와 폭정 대신 마음으로 우주를 다스릴 수 있다고 믿었다. 다른 대가문도 이에 감화돼 아트레이데스를 신임했고 황제가 시기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는 아트레이데스가 아라키스 행성을 식민 지배하도록 명령한다.
아라키스는 사막 행성으로, 멜란지(스파이스)를 생산할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이다. 멜란지의 효능은 초능력이다. 노화를 막고 수명을 늘려주며 예지 능력을 얻을 수 있다. 행성 간 이동을 할 때 항법사가 필수로 하는 만능 물질이다. 스파이스(Spice)의 뜻이 향신료라는 점을 생각하면 향신료와 석유를 둘러싼 전쟁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아라키스 식민 지배권은 겉으로는 큰 혜택이지만 사실 함정이다. 전 우주에서 멜란지를 필요로 하기에, 일정 생산량을 채우지 못하면 대가를 치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이 행성을 폭정으로 지배해 온 하코넨 가문이 잠시 떠나고, 새로 식민 지배권을 가진 아트레이데스 가문이 아라키스를 지배한다. 그러나 이는 오래가지 못하고, 황제의 비호 아래 하코넨이 행성을 침략해 아트레이데스를 멸문한다.
이 일로 아트레이데스의 공작 레토는 죽고, 아들 폴과 첩 제시카는 가까스로 사막 한가운데 불시착한다. 사막은 몸 맡길 곳 없는 야생 그 자체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 프레멘의 거주지를 찾아 나선다. 프레멘은 행성의 원주민으로, 스스로 물을 재활용하는 사막복을 입으며 자체 관습, 문화, 무기 등으로 야생에 적응한 존재들이다.
폴과 제시카는 프레멘의 일원이 된다. 이들은 자기 가문을 멸족한 것에 대한 복수의 뜻으로, 프레멘 역시 자기들을 억압하던 하코넨에게 복수하고 사막을 식물이 가득한 낙원으로 만들고자 뜻을 모아 항거한다. 예지 능력이 있는 폴은 프레멘 사이에서 행성을 구원할 메시아적 존재로 떠오른다. 제시카는 전 우주를 뒤에서 조종하는 여성 조직 베네 게세리트의 일원으로서, 프레멘의 대모 자리를 물려받아 그들에게 자기 사상을 세뇌하기 시작한다.
영화 '그을린 사랑' 포스터(왼쪽), 영화 '컨택트' 포스터(가운데), 영화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포스터(오른쪽)
빌너브의 영화들, 서로 시공간·배경 달라도 주제 의식·형식은 유사해
빌너브의 영화들은 비슷한 주제 의식과 형식을 공유하고 있고, 이 특징은 「듄」을 영화화하는 데 제격이었다. (우리나라에 개봉한 그의 영화 중 ‘에너미’만 아직 못 봤다). 선악의 동질성,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빨려 들어가는 주인공의 상황, 이 상황 속에서도 제3의 길을 걸어가려는 주인공의 의지, 점점 조여 오는 양극단 사이에 놓인 고독자의 비극성과 질식감,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는 연민과 존중 어린 감독의 시선 등을 꼽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 처음 개봉했던 그의 영화는 2010년 작 ‘그을린 사랑’이다. 레바논 출신 작가의 희곡 「화염」이 원작이다. 영화에서 명시하진 않았으나 기독교와 이슬람교 간의 종교 전쟁이었던 레바논 내전을 배경으로 한다. 기독교 신자인 주인공 나왈은 난민이었던 연인과 사랑의 도피를 시도한다. 하지만 곧바로 자기 형제들에게 들켜버리고 연인은 눈앞에서 살해당한다.
연인 사이에서 가진 아이는 고아원에 맡겨지고, 나왈은 아이를 찾으러 가고자 버스에 탄다. 그런데 기독교의 테러리스트들이 자기만 살려두고 버스에 탄 사람 모두를 살해한다. 그는 이 일을 겪고 폭력과 분노의 연쇄를 끊고자 이슬람교 테러리즘에 가담한다. 나왈과 폴은 같은 위치에 있다. 불타는 버스를 배경으로 넋이 나간 나왈의 옆모습, 땅에 손을 짚으며 눈물 흘리는 폴의 모습은 공통된 배경과 정서를 지니고 있다.
2015년 작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는 마약 카르텔을 소탕하는 내용이다. 이런 소재일수록 (예를 들면 ‘범죄도시’처럼) 통쾌한 권선징악 서사로 끝맺어지곤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쉬운 작법을 포기한다. 주인공들이 카르텔의 뿌리를 흔드는 중심 서사와 별개로 매수된 경찰, 카르텔 간부들이 각자 가족과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는 장면들이 중간중간 삽입된다. 그리고 CIA 활동의 불법성을 강조해 선과 악의 경계가 없으며, 뻘밭에서 정의를 부르짖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지 체감시킨다.
2016년 작 ‘컨택트’는 ‘듄’ 시리즈와 비슷한 형식을 갖고 있다. 미지의 외계 물체인 쉘이 지구 각 지역 상공에 떠 있는 채 등장한다. 언어학자 루이스는 쉘에 들어가 외계 생명체에게 언어를 가르친다. 미지의 존재를 두려워하는 미군과 중국 등이 루이스를 점점 조여온다. 이 영화는 중간마다 인서트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듄’ 시리즈와 유사하다. 컨택트의 인서트가 하나의 의미로만 기능했다면, 듄은 자유의지라는 주제의식을 덧대면서 보다 확장된 인서트라고 볼 수 있다.
영화 '듄: 파트2' 스틸 사진
어떻게 해도 비극으로 끝맺어진다는 자유의지의 한계와 딜레마
영화 초반 폴은 선을 긋는다. 자기는 메시아적 존재가 아니고 사막의 생존법을 터득하러 온 사람이라고. 예언은 그저 베네 게세리트가 지어낸 말이라고. 그는 스스로 프레멘들에게 중요한 존재란 걸 알지만, 숭배되는 존재로서는 여겨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그가 마주해야 하는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아라키스는 남부와 북부로 나누어져 있다. 그 경계에는 국경 장벽처럼 거대한 폭풍이 있다. 하코넨이 장악한 수도 아라킨이 있는 곳이자 모든 멜란지 채굴이 이뤄지는 곳은 북부다. 남부는 수백만 명의 프레멘들이 살고 있지만 척박한 곳이다. 행성을 식민 지배하는 하코넨도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었다. 폭풍 경계를 뚫고 이동하려면 거대한 모래벌레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
영화에서 프레멘 내부의 갈등 요인은 지리적 특성에 기인한 생활 문화의 차이다. 북부 프레멘은 자기들을 스스로 구원한다는 신념을 갖고 전사로 활동한다. 하코넨 가문의 폭정으로부터 자기 터전을 지키기 위해 자연스럽게 그런 존재가 됐고, 모래 속에 숨어 있다 불시에 덮치는 게릴라 전투를 성공한 경험도 있다. 그렇기에 이들은 메시아가 프레멘 내부의 존재여야 한다고 믿으며, 외부 존재를 경계하는 저항력을 가진다.
남부 프레멘에게 스스로 구원할 수 있다는 건 배부른 착각이다. 어떤 가치도 없어 보이는 척박한 곳이기에 이곳에 마술을 부려줄 메시아적 존재가 찾아오길 기도할 뿐이다. 자력으로 구원할 수 없는 지역 특징에 의해 외부 존재에 대한 저항력도 없다. 제시카가 남부의 프레멘들을 세뇌하러 남부로 향했고 이것이 폴에게 걸림돌이 된다.
외부의 적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하코넨 가문에서 아라키스를 새로 관리하는 인물로 페이드 로타 하코넨이 등장한다. 그는 폴과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사실상 폴과 데칼코마니 관계다. 페이드 로타는 첫 등장 시퀀스에서 방어막을 착용하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결투에서 이긴다. 1편 마지막 폴과 자미스의 결투 장면과 같은 맥락이다. 전투 능력과 머리싸움, 그리고 각 진영에서의 위치도 대등하다.
예언을 미신이자 세뇌의 결과물로 치부했던 폴이지만, 북부 프레멘 거주지가 무자비하게 폭격당하고 살길은 대항뿐만이 되자 예언에 기댄다. 끝내 퀴사츠 해더락, 부계와 모계의 기억을 모두 불러올 수 있으며 미래를 예지할 수 있는 자, 동료로부터 숭배되는, 가장 혐오했던 존재가 되었다. 1편에서 자미스의 역할로 상징되는 자유의지가 가진 희망은, 언젠가 꺾일 수밖에 없다는 한계와 공허함에 부딪혔다.
드니 빌너브의 ‘듄: 파트3’은 어떤 모습일까. 그의 영화들은 절망에 가까운 비극으로 끝나거나, 비극으로 끝나더라도 자그마한 희망의 의지를 되새기며 끝나거나였다. 원작의 내용과 ‘듄: 파트2’의 분위기로 속편의 느낌을 생각해 보면, 아마 관객은 애걸복걸하며 영화를 보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원작보다 주체적으로 각색된, 메시아적 존재인 폴과 대척점에 서서 스스로 구원하겠다는 챠니의 모습에서 불씨의 온기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