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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on현 Mar 02. 2023

Ep.7 │ 벌거벗은 순례길

산티아고 핑계 삼아 떠난 유럽여행_에스떼야

이제는 오전 6시만 되면 자동으로 눈이 떠진다. 일어나는 것도 그렇게 힘들지 않다.

일주일정도가 지나니 몸이 이 생활에 적응을 하고 있는 듯했다. 오늘은 배낭에 꾸역 구역 집어넣어야 들어갔던 짐이 가지런하게 들어가는 것으로 보니 나만의 배낭에 짐 싸는 방법 또한 터득한 듯하다. 괜히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오늘은 아침부터 햇살이 따뜻하게 비춰주고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까지 완벽한 하루의 시작이다.  

앞에 펼쳐져 있는 풍경을 카메라로 담기 위해 걷다가 걸었다가를 반복했다. 열심히 카메라로 이 순간을 기록하고 있지만 역시나 눈앞에 있는 이 느낌을 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오늘의 코스는 그렇게 가파르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오르막길을 걷게 된다. 다행히도 날씨가 좋고 다리 컨디션도 좋아서 언덕이 나와도 쭉쭉 걸어 나갔다. 순례길을 일주일정도 길을 걷다 보면 나의 걸음속도를 어느 정도 알게 되는데 나는 다른 분들에 비해 걷는 속도가 빠른 편이라 동행분들과 함께 걷다가도 "나중에 봐요!"라는 말을 남기고 혼자 걷게 되는 시간이 조금씩 생겨났다. 사람들과 같이 걷는 것도 분명 좋지만 혼자 걸으면서 나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도 이 순례길에서 꼭 필요한 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순례길을 혼자 걸으면 이전까지 살았던 내 삶에 대해서 반성하는 시간을 가지거나 무언가를 느껴야만 할 것 같지만 나에겐 3주가 넘는 시간이 남아있었고, 생각을 하면서 걷기보다는 우선은 옆에 있는 풍경을 벗 삼아 신나게 걷기로 마음먹었다.


혼자 걷는 시간에는 에어팟을 꼽고 노래를 들었다. 특히 윤하의 '사건의 지평선'이라는 노래가 뭔지 모르게 주변 모습과 너무 찰떡같이 느껴져 무한반복으로 들었다. 여행을 가면 꼭 그곳에 어울리는 노래가 하나쯤은 있었는데 이곳 순례길에서는 윤하노래와 잔나비노래가 찰떡인 듯하다.


오늘 도착지인 에스떼야까지는 4개의 작은 마을을 지나야 하는데 모든 마을의 공통점이 고도가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저 멀리 마을이 보이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바로 앞에 언덕이 기다리고 있었다.


언덕을 넘어 넓은 평지가 나오기 시작하자 드넓은 포도밭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유튜브에서 봤던 산티아고포도밭은 주렁주렁 달려있었지만 내 눈앞에 있는 모습은 이미 수확을 끝낸 이파리들만 무성한 포토밭만 가득했다.

이와 더불어 가는 길목에는 순례자들을 위한 기부마켓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역시나 운영하고 있지 않았다.

원래 같았으면 이곳에서 잠시 쉬면서 음식을 사 먹고 기념품도 고르는 순례자들로 북적거릴 텐데... 비수기의 순례길을 무언가 모르게 쓸쓸하게 느껴진다. 비수기의 순례길은 순례자들에게 편안하면서 고요한 순간을 제공하지만 그만큼 순례길에서 즐길 수 있는 것들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나는 비워있는 상자를 괜히 툭툭 쳐본 뒤 앞으로 계속해서 걸어 나갔다.


계속해서 나오는 오르막길이 조금은 얄미웠지만 눈앞에 펼쳐진 풍경들이 나의 모든 감정을 진정시켜주었다. 순례길을 와서 가장 많은 사진을 찍은 날이 아닌가 싶다. 오늘은 열려있는 바(Bar)를 계속해서 만나지 못해 휴식을 많이 취하지 못했는데 마침 3번째 마을에서 열린 바가 있어 들어가 라임맥주 한잔과 함께 하몽샌드위치를 주문하고 점심을 해결했다.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순례길을 벌써 5번째 걷고 계시는 새로운 한국분과 인사를 나누었다.

"저는 벌써 이번이 순례길 5번째예요"

"진짜.... 대단하세요. 저는 이번에 처음이에요"

"아마 순례길 한번 오시면 계속 오고 싶어 지실 거예요.. 이 길이 중독이에요"

"저도 아마 한국에 돌아가면 그리워하겠죠?"라고 웃으면서 나는 대답했다.

그렇다... 이 글을 적고 있는 지금도 다시 산티아고에 가고 싶다.

곧이어 YJ누나도 합류해 같이 휴식을 취했다. 그나저나 YJ누나는 한국에서 등산 동호회활동을 해서 그런지 웬만한 남자분들보다 체력이 더 좋은 것 같다.


스페인 마을은 대도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너무 조용하다. 내가 걷는 시간이 주로 이른 아침에서 점심시간 때이기는 하지만 '다들 집에 계시는 걸까?' '저 집에는 사람은 살고 있는 걸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조용하다.

그러다가 문득 마을 곳곳에 붙어져 있는 순례길 마크(조개모양)와 수많은 집 벽에 그려져 있는 까미노(길) 안내표지(노란색 화살표)를 보면서 이런 부분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이 세계적인 관광상품이 된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우리나라였어도 나랑 아무 상관도 없는 관광상품 때문에 내 집에 안내판을 그리거나 붙인다고 했을 때 협조해 주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걷다 보면 마을들마다 조금씩 다른 까미노 안내 표지판을 비교해 보는 것도 순례길을 걷는 동안 하나의 재미가 되고 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걷다 보니 오늘 도착지인 에스떼야 마을에 도착했다. 12시 55분이라는 이른 시간에 도착했다. 하루하루 마을에 도착하는 시간이 빨라지고 있다. 굳이 빨리 도착하려는 생각은 없었지만 이렇게 조금씩 일찍 마을에 도착하면 머무르는 마을을 구경할 시간이 많아져 좋은 듯하다. 나는 오늘도 해냈구나는 생각과 함께 침대에 짐을 풀고 따뜻한 물에 몸을 녹였다.


여유롭게 나갈 준비를 마친 뒤 숙소 밖으로 나왔다. 분명히 평일이고 오후시간인데 3~4개 정도의 바에서 사람들이 맥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러한 모습들은 내가 살고 있는 한국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적응이 되지 않는다. 괜한 걱정이겠지만 언제 일을 하시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든다.

에스떼야의 마을 분위기는 내가 상상했던 유럽 소도시의 느낌을 제대로 받을 수 있었다. 파란 하늘에 건물들 사이로 흐르고 있는 조그마한 강까지 이미 5시간이 넘도록 걸어왔지만 분위기에 취해 마을을 돌아다녔다. 나는 이 분위기를 자랑하고 싶어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영상통화를 걸어 걷고 있는 지금 순간을 자랑했다.


시간이 지나 다른 분들도 알베르게에 모두 도착해 어제 같이 저녁을 먹었던 멤버들과 함께 바에 들려 맥주를 한잔했다. 열심히 걷고 나서 바에서 여유롭게 맥주 한잔. 이게 바로 내가 원했던 산티아고 순례길을 모습이자 내가 여기 온 이유 중에 하나다.


한번 더 순례길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Buen camino

좋은 길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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