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핑계 삼아 떠난 유럽여행_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
오전 7시 나헤라 공립알베르게 직원분들의 기상소리에 잠에서 깼다. 나는 일어나자마자 눈을 비비며 부엌 냉장고를 열어 어제 사놓은 요플레를 뜯어 아침을 해결했다.
씻고 나오니 한국인 분들 단체 톡에는 길에서 보자는 카톡이 와있었다. 발의 상태가 좋치않았던 BG형님과 SY형님은 아침 일찍 출발하신 모양이다. 뭔가 길에서 보자는 말이 기분 좋게 들리는 것 같다. 이곳 순례길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느낌이 들어서일까 가끔 만나는 순례자들과도 "길에서 또 만나요!"라고 인사하고 나면 다시 꼭 만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오늘 도착지인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 마을까지는 21km 정도면 도착한다. 3일간 30km 이상을 걸었더니 이제 20km 정도는 사뿐하게 느껴진다. 길이도 짧은 만큼 오늘은 평소보다 더 천천히 주변을 바라보면서 걸어보자는 다짐을 했다. 급한 것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빨리 도착하고 싶은 마음에 급해지기도 했던 것 같다.
나헤라 마을 뒤쪽으로 순례길이 계속 이어진다. 조그마한 언덕을 지나니 미국의 그랜드캐니언이 살짝 생각하는 흙으로 덮인 언덕이 나온다. 구름 한 점 없는 완벽한 하늘에 어떤 순례자분은 언덕 위로 올라가 바위에 누워 그 순간을 간직하고 있다. 선선한 바람까지 물어보는 오늘은 순례길에 와서 가장 완벽했던 날씨가 아니었나 싶다.
오늘도 어김없이 끝이 보이지 않은 평야지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5km 정도를 걸으니 첫 번째 마을이 나타났고 어제 마켓에서 사놓은 간식이 충분했기 때문에 다음 마을에서 휴식을 취하자는 마음으로 휴식 없이 계속 길을 걸었다. 하지만 마을은커녕 평소에는 중간중간마다 보였던 그 흔한 나무의자도 보이지도 않고 끝없는 평야만 내 눈앞에 나타날 뿐이었다. 그래도 날씨가 좋아 천만다행이었다.
어젯밤에 보조배터리를 충전한다고 휴대폰 충전을 못해서인지 벌써 배터리가 다 되어서 보조배터리를 가방에서 찾았다. 그런데 언제나 똑같은 자리에 있어야 할 보조배터리가 보이질 않는다.
분명히 오늘 아침에 충전이 다 된 걸 확인하고 충전 선을 가방에 넣은 것까지 기억이 난다. 잠시 멈춰 바닥에 배낭을 내려놓고 짐을 한참 뒤져봤지만 보조배터리는 나오질 않았다.
'아... 그냥 선만 챙기고 배터리를 두고 왔구나....'
휴대폰 배터리는 8%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사실 휴대폰이 없어도 잘 갈 수 있었지만 항상 내가 걷는 거리와 시간을 휴대폰으로 기록하고 있는 중이라 괜히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래도 다행히 5km만 더 걸으면 산토 도밍고에 도착한다.
폰 없이도 잘 갈 수 있을 거라 다짐해 보지만 괜히 마음이 급해지는 건 사실이었다. 산토 도밍고 바로 직전 마을에도 규모가 큰 골프장 말고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는 주거단지였고, 어쩔 수 없이 나는 계속해서 길을 걸어 나갔다. 그 와중에 하늘은 왜 이렇게 이쁜 건지.... 평소 같았으면 카메라를 꺼내 찍고 또 찍는다고 시간 다 보냈을 텐데, 오늘은 어쩔 수 없이 패스하고 발걸음을 재촉해 본다. 그나저나 어제는 수건, 오늘은 보조배터리 이틀 내내 물건을 잃어버렸다. 순례길이 많이 편해져서 그러는 건지, 내가 정신을 못 차리는 건지... 아무래도 둘 다 해당할 듯하다.
끊임없는 직진코스가 이어지고 왼쪽 뺨이 햇빛 때문에 조금씩 달아오를 때쯤 산토 도밍고 마을 초입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규모가 큰 마을이었다. 유소년 축구장도 있고 스포츠용품점도 있어서 숙소에 짐을 두고 수건을 사러 오면 되겠다 생각했다.
알베르게에 도착한 시간은 12시 30분. 오늘 숙소인 산토스 알베르게는 13시에 연다고 해서 바로 앞 공원에 앉아 바게트와 하몽을 꺼내 먹었다. 10분 뒤 알베르게 관계자가 나에게 들어오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1등으로 왔다며 마음에 드는 침대에 짐을 풀어라며 환영해 주었다. 난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2층으로 올라갔다. 이곳 산토스 알베르게는 깨끗하고 엄청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론세스바예스 이후로 가장 좋은 숙소가 아니었나 싶다. 특히 알베르게에서 보기 힘들다는 헤어드라이기까지 구비되어 있다. (물론 돈을 내야 한다....)
나는 콘센트 바로 옆에 창문을 바라볼 수 있는 침대에 짐을 짐을 풀고 여유롭게 샤워를 했다. 햇빛도 화창해 그동안 못 말렸던 우비와 신발을 꺼내 창문에 걸어놓았다. 너무 좋았던 날씨 탓인가 기분이 너무 좋았다.
나는 숙소 바로 옆에 위치한 스포츠용품점에 들어가 극세사 수건과 모자를 하나 샀다. 모자를 한국에 깜빡 놓고 오는 바람에 살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마침 마음에는 드는 모자를 발견해 구매를 했다.
(이 날 모자 구매는 내가 순례길에서 했던 가장 올바른 선택이었다)
가게를 나와 마을 한 바퀴를 크게 돌았다. 광장 주변으로 분수대, 성당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으며 바(Bar)에는 어김없이 마을 사람들이 모여 맥주 한잔을 하고 있었다. 스페인 마을은 비슷하면서도 사뭇 다른 각자의 매력을 풍겨 매일매일 마을을 돌아다녀도 지겹지가 않은 것 같다.
구경을 마치고 숙소에 들어와 잠깐 잠이 들었다. 저녁 먹으러 가자는 SY형님의 말에 냉큼 준비하고 밖으로 나왔다. 오늘 구글 검색에서 찾은 식당에 갈 예정이다. 식당 리뷰에는 한국인들의 긍정적인 댓글이 가득해서인지 믿음이 가는 식당이다. 우리는 식당에 도착해 문어요리와 리조또를 시켰다. 바르셀로나 여행 때 너무 짠 리조또만 먹어서 그런지 걱정스러웠지만 다행히 내가 먹은 리조또 중에 가장 덜 짜고 맛있었다. YJ누나가 사주신 와인까지 거하게 저녁을 마무리한 후 게빈과 안드레아도 합류해서 2차로 맥주집으로 향했다. 맥주를 먹고 한껏 기분이 좋아진 게빈이 숙소에 가서 간단하게 와인 한잔 더 하자며 화이트 와인 2병을 사 왔다. 한국인보다 더 술을 좋아하는 친구다.
우리는 숙소에 들어와 부엌에서 다 같이 모여 와인을 한잔했다. 마침 오늘 처음 만난 일본인 토모미 상과 호주에서 온 앨런이라는 친구도 함께 합류해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간단한 한국어를 구사할 줄 알았던 토모미상은 한국 드라마를 좋아해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하셨다. 리액션이 얼마나 좋던지 덕분에 분위기가 한층 끌어 올랐던 것 같다. 결국 우리는 12시가 넘도록 와인 6병을 마신 다음에야 자리가 마무리되었다. 특히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의 언어, 문화에 대해 공유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국가, 언어, 문화 등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들이 모여 함께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게 순례길에 오는 가장 큰 이유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은 순례길 와서 가장 크게 가장 많은 웃었던 날로 기억이 남았다.
Buen camino
좋은 길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