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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님말고 Apr 02. 2019

상하이에서. #3

다시는 예전 같을 수 없겠지.

19.03.16 - 17


첼시가 방문을 두드렸을 때, 나는 1호에 실렸던 글을 쓰고 있었다. 자는 척, 저 문을 열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생각했다. 첼시가 보고 싶으면서도 보기가 싫었다.

그녀는 금요일 근무를 마치고 세 시간을 날아서 상하이에 도착한 참이었다. 공항에서 기다리는 시간과 공항까지 오가는 시간을 합치면 일곱 시간. 여기서 주말을 보낸 후에는 월요일 출근을 위해 똑같은 여정을 반복해야 했다. 굳이 왜?

문간에 선 첼시의 얼굴이 피곤해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금세 환해졌다. 오히려 품에 와락 안기더니 나보고 피곤해 보인다고 말하는 첼시. 나는 자다 깼다고 둘러댔다. 내가 느끼는 복합적인 감정을 이 아이는 물론 나 자신에게도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첼시와 이틀을 보냈다. 글로는 온갖 우울한 척을 다 했지만 사실 즐거웠다. 그녀와 있으면 모든 순간이 즐겁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끝 맛이 씁쓸할 수도 있다는 것도 일정 내내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가고 싶은 데 있어?"


이렇게 물었더니 없다고 했다. 나를 보러 온 거니까 아무 데나 가도 상관이 없다나. 그래서 우리는 정말 아무 데나 갔다. 그중 몇 가지를 시간 순서와 상관없이 소개한다.



1. **<중><요>**

상하이에 가면 프랑스 조계지라는 지역이 있습니다. 별 건 없는데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빵이 있습니다. 선플라워(Sunflour) 베이커리에 가서 씨솔트 브레드 먹으세요.




2.

정말 아무 데나 가는 바람에 어딘지도 모를 동네를 걷게 됐다. 지금도 거기가 어딘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관광지보다 이런 곳들을 더 좋아한다.


사다리를 의자고 쓰고 계셨다
어떻게 올라가셨...어요..?



3.

위위안. 중국식 정원으로 알고 갔다가 중국식 무덤이 될 뻔했다. 압사 조심.



4.

우리의 한 번뿐인 밤에는 푸동과 와이탄에 갔다. 강변에 위치한 상하이의 가장 대표적인 장소들이다. 도시를 동서로 가르고 있는 황푸강을 경계로 와이탄은 서쪽, 푸동은 동쪽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 여기서는 푸동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와이탄에서 본 푸동은 이렇게 생겼다.

홍콩의 빅토리아 하버와 많이 닮은 모습이었다. 그곳에서 첼시와 밤새 앉아있었던 기억이 선명한데, 또다시 상하이에서 만나다니.

이번에는 밤새 감상하는 대신 푸동으로 건너갔다. 우리가 빅토리아 하버에 좋은 추억이 있다는 걸 빼고 생각하더라도, 와이탄에서 바라본 푸동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많이 아쉬웠다. 앉을 곳은 없고 관광객은 많다. 밤이 늦어서 관광객들이 사라지면 푸동의 건물들도 불을 모조리 꺼버린다. 무엇보다도 전광판에 "I ♡ SHANGHAI"라는 문구가 쉴 새 없이 나와서 부담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사실 푸동은 가까이서 봐야 매력적인 곳이다. 영화감독 스파이크 존즈가 <그녀> 속 근미래의 모습을 담기 위해 푸동에 온 것은, 아마도 끝없이 이어진 육교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동그랗게 원형으로 생긴 육교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면 끝없이 높은 건물들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나는 푸동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까마득히 높은 빌딩들을 올려다볼 때마다 위압감이 느껴져서 좋았다. 건물은 크고, 사람은 작다. 아마 이 육교를 걷는 그 누구도 푸동을 스쳐갈 뿐, 가질 순 없을 것이다. 누구의 것도 아닌, 그곳을 걷는 사람들의 총합보다도 훨씬 거대한 공간.

또한 푸동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이질적이다. 그래서 좋았다. 푸동에서는 모두가 외국인이다. 중국인도 예외가 없다. 푸동에 동화될 수 있는 인간은 아직 태어나기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유토피아는 아닐지라도, 가까운 미래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공간.



5.

사실 위의 감상은 처음 도착한 몇 분 동안 느낀 것이고, 곧 푸동은 타락한 도시가 되어버렸다. 이게 다 첼시 때문이다.

첼시가 동방명주를 보면서 연상되는 게 없냐고 물어서 없다고 했다. 정말로 없었다. 이렇게 기괴하게 생긴 건물이 무엇과 닮을 수 있을까? 그러자 첼시가 사진을 하나 보여줬다. 아니 그건...

...성인용품이었다.


정말 하나도 안 비슷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진과 첼시를 번갈아보다가 동방명주를 다시 올려다봤더니...

     어!?

어떤 용품인지 용도를 설명하기도, 사진을 올리기도 곤란한데.. 정확한 명칭을 모르겠다. 일반적으로는 잘 안 쓸 물건이라. 구슬을 꿰어놓은 것처럼 생겼다는 점에서 동방명주와 유사하긴 하다.

(궁금하신 분은 개별 문의하세요. 친절하게 사진 첨부해드립니다.)

첼시가 보여준 "그 물건"은 자줏빛이었는데, 돌아보니 하필 동방명주에 자주색 불이 켜져 있었다. 대단하게 닮은 게 아닌데도 한 번 연상시키고 나니까 돌이킬 수가 없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내 머릿속은 이미...

코끼리코끼리코끼리코끼리코끼리코끼리코끼리코끼리코끼리코끼리코끼리코끼리코끼리코끼리코끼리코끼리코끼리코끼리코끼리코끼리코끼리코끼리코끼리코끼리코끼리코끼리코끼리코끼리...



6.

아직 끝이 아니다. 푸동의 강변을 거닐고 있는데 반가운 광고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건 바로


한국인의 맛! 푸라면!

그걸 여기서 만날 줄이야. 반가워서 사진을 찍고 있는 나에게 첼시가,

     "그거 알아? 저 건물 이름 진짜 이상해."

불안한 맘으로 인터넷에 쳐봤다.


또 성인용품....

왠지 위의 "그 물건"보다는 좀 덜 부끄러워서 밝히겠다. 바이브레이터라는 뜻이다. 처음에는 첼시가 장난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정말로 바이브레이터라는 뜻이었고, 동명의 회사가 있었다.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회사였던 것으로 기억.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생각해보니...

한국으로 치면 안성기 씨 같은 거구나.


강 건너 와이탄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수천 명의 관광객들이 바이브레이터 빌딩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고 있을 것이었다. 바이브레이터 빌딩 뒤에는 성인용품을 본뜬 거대한 빌딩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시는 푸동이 예전 같을 순 없겠지.




"네가 내 상하이를 망쳤어!!!"


징징대는 나를 바라보는 첼시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밤이 늦어지면서 우리는 낯 뜨거운 건물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정착하기로 했다. 재즈바에서 첼시와 마주 보고 앉게 된 나는, 그녀가 굳이 왜 여기까지 날아왔는지 알게 되었다.




4월 초중순부터는 유럽 여행기가 연재됩니다. 브런치가 아니라 여기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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