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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님말고 Mar 27. 2019

상하이에서. #2

이상한 인연이 하나 있었다.

1호가 나간 후에 몇몇 사람들의 연락을 받았다. "그래서 도대체 누가 왔다는 거야?" 그걸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잠시 과거로 돌아가야할 것 같다.


이상한 인연이 하나 있었다.


‘있다’라고 말하곤 했었는데 이젠 ‘있었다’라고 해야 할 것 같다.     


2013년 가을학기, 우리는 넓적한 히터 위에 걸터앉아서 다리를 앞뒤로 휘젓고 있었다. 그 아이의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첼시. 내가 응원하는 축구팀과 똑같았다. 본인은 허공에 삐뚤빼뚤 한글을 써가며 ‘챌’시라고 주장했지만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어색했다. 나는 ‘첼’시가 더 자연스럽다고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한국말이 서툰 홍콩 출신 교환학생을 설득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장난 섞인 이름 표기법 논쟁은 쉬는 시간 내내 계속되다가 결국 영어 표기를 기준으로 삼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그래서 그 날 수업에서 처음 만난 동갑내기 여자아이는 ‘Chelsie’라는 이름으로 내 전화번호부에 추가됐다.

     

하지만 학기가 끝날 때까지 나는 한 번도 전화번호부에서 첼시를 검색하지 않았다. 별 이유는 없었다. 친해질 것 같다가도 흐지부지되는 경우야 많으니까. 그런데도 나는 그녀가 한국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을 함께하게 되었다.     


솔직히 그 날 저녁은 기억이 잘 안 난다. 원래는 첼시가 홍콩으로 돌아가니까 송별회를 열기로 했었다. 나는 얼떨결에 초대가 됐는데, 공교롭게도 초대된 사람들이 하나둘씩 급한 일이 생겼다는 말과 함께 불참 통보를 했다. 그래서 저녁을 먹을 때엔 세 명밖에 없었고, 2차를 어디로 갈까 고민하는 동안엔 슬그머니 한 명이 집에 가버렸다. 우리 둘만 남았고, 어느새 저녁은 밤이 되어 있었다. 기억이 선명하다, 그 날 밤은.




처음 만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수업에서 겨우 인사만 했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세계맥주집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Nice to meet you, 하면서 장난스레 악수를 나눴다.     


저녁 열 시. 내 앞에 앉은 아이는 열 시간쯤 뒤면 서해 위를 날고 있을 것이었다. 우리는 앞으로 영영 보지 못할 것이라는 데에 의견을 같이했다. 길게 대화를 해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인데, 술이 깨면 딱히 할 말도 없을 것이고, 앞으로 홍콩과 한국을 오갈 일도 없을 것이다. 서로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지만, 굳이 알아야 할 필요도 없는 사이.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서 딱 하나씩만 정보를 주고받기로 했는데,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가장 은밀한 비밀을 털어놓기로 했다. 솔직하게 말해야겠다. 낯선 사람이 나에게 은밀한 비밀을 속삭인다면, 그건 흥미로운 일이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 나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을 꺼내서 슬쩍 보여준다면, 그건 흥분되는 일이다. 사실 일기를 쓰면서 가끔은 누군가가 우연히 읽어주길 바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날의 우리는 상대방의 눈앞에 일기장을 떡하니 펼쳐 보인 셈이다.     


물론 진짜 비밀은 일기장에조차 쓰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 나아갔다. 머릿속에 있는 꽁꽁 잠긴 문 앞으로 서로를 데려가서 열쇠를 건넸다.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녹슨 열쇠였다. 이야기는 밤새 이어졌다.     

아침 6시가 가까워서야 우리는 부랴부랴 첼시의 하숙집으로 달려갔고, 급히 짐을 꺼내서 택시 트렁크에 밀어 넣었다. 곧 어둠이 걷힐 것이고 첼시는 이 나라를 떠날 것이다. 첼시가 나를, 내가 첼시를 세게 껴안았다. 택시 문을 열면서 그녀가 물었다.     

     “우리 진짜로 다시는 볼 일 없겠지?”

     “전-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꾸를 했지만, 나는 택시가 점이 되어 사라진 자리를 한참 동안 지켜봤다. 정말 해가 뜨긴 할까.     


집까지는 느릿느릿 걸어갔다. 혹시 비행기를 놓치진 않았을까 생각했지만, 연락을 하지는 않았다. 해가 뜨고 있었다.




그리울 때가 가끔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리운 것인지, 그 날 밤의 공기가 그리운 것인지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첼시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홍콩 사람이니까 첼시는 편의상 부르는 영어 이름일 것이고 광둥어 이름이 있을 텐데, 그걸 몰랐다.

    

놀랍게도 우리는 몇 번 더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매번 우리는 그 날 밤으로 돌아갔다. 상황이 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처음에는 첼시가 대뜸 연락을 해서는 한국 여행을 가는데 딱 하룻밤이 빈다고 했고, 두 번째엔 내가 교환학생을 가려고 끊은 비행기가 하룻밤 홍콩에서 경유를 했다. 매번 해가 지면 우리의 세상의 열렸고, 동이 트면 우리는 각자의 세상으로 돌아갔다. 돌아가고 나면 다음번 만날 일이 있을 때까지 연락을 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딱히 한 것도 없다.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눴다. 서울에서는 밤새도록 벚꽃 핀 거리를 걸었고, 홍콩에 갔을 땐 동이 틀 때까지 빅토리아 하버에 앉아있었다. 어렴풋이 로맨틱했던 순간들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그 순간 그대로가 좋았다. 나는 한 번도 첼시에게 진짜 이름을 묻지 않았다.     

세 번째에는 내가 홍콩에 놀러갔다. 나의 어린 시절을 함께했던 성룡의 나라를 제대로 둘러보고 싶었다. 그 사이에 첼시는 회사원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주말에 하루 정도 보자고 연락을 했는데, 출국을 며칠 앞두고 덜컥 답장이 왔다.     


     “휴가냈어.”




그녀는 외곽에 살았다.


늦잠을 자고 느릿느릿 나를 만나러 나왔다가 밤이 늦어지면 집으로 돌아갔다. 막상 낮에 만나니까 별 느낌이 없었다. 여느 친구를 만난 것과 다름이 없었는데, 그게 싫지 않았다. 그렇게 사흘을 보낸 후에 태풍이 몰려왔다.     


태풍이 자주 오는 홍콩에서도 역대급이라고 했다. 홍콩에서는 태풍의 위력을 8개 단계로 구분하는데, 7과 8을 오가는 어마어마한 녀석이었다. 10단계였나 싶기도 한데, 그랬다면 9와 10을 오가는 위력이었다. 전국에 등교 및 출근 금지령이 내려졌고, 모든 대중교통은 운행을 중지했다. 뉴스를 보니 지붕이 뜯어져 날아가고, 전봇대가 쓰러지고, 화물차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나와 벽 하나를 두고 실시간으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첼시도 같이 뉴스를 보고 있었다. 방심하고 나왔다가 발이 묶여서 내 숙소에 갇혀있는 상태였다. 좁아터진 방에 두 명이 있으니 답답했고, 무엇보다도 심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낮잠을 잤다. 깨어보니 자정이 넘어있었고 뉴스에서는 태풍이 조금 잦아들었다는 소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첼시도 자고 있었다. 나는 우산을 들고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태풍도 홍콩의 명물이니까 직접 봐야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로비의 유리문 안에서 보니 비바람이 온 세상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간판이 뜯어진 건물들도 보였다. 나가도 될까. 내가 여행자보험을 들었었나.     

     “나라면 죽어도 안 나간다.”     

첼시가 어느새 곁에 서 있었다. 오기가 생긴 나는 첼시의 팔을 붙잡고 길거리로 나갔다.     


아무도 없었다. 그 넓은 거리에 차도, 사람도 없었다. 우리뿐이었다. 신호등만 혼자서 깜빡거리고 있었다. 신호등 아래 길 양쪽으로는 망가진 우산들이 줄지어 나뒹굴고 있었었는데, 바람이 찌그러트린 우리 우산도 그열에 합류했다. 나는 사람들이 길거리로 돌아올까봐 겁이 났다. 이 대도시가 텅 비어있을 때 발도장을 찍어두고 싶었다. 그렇게 다시 우리는 그 날 밤으로 돌아갔다. 밤새도록 비바람 속에서 홍콩의 대로와 골목길을 쏘다녔다. 시끄럽게 노래를 불러도, 무단횡단을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밤사이에 태풍은 조금씩 잦아들었다. 해가 뜰 무렵 우리는 헤어졌고, 나는 숙소에 돌아와 샤워를 한 뒤에 마카오로 가는 배를 탔다. 마카오는 홍콩보다도 피해 상태가 심각했다. 그렇게 짜릿했던 홍콩의 태풍이 마카오에서는 무시무시한 자연재해였다.




첼시와는 2년 정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나는 최악의 시간을 보냈다.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이 상처를 준 사람들을 만났고, 상처를 준 일들을 겪었다. 매일같이 깊이, 더 깊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더니, 나중에는 내가 수면 위에 있을 때에는 어떤 모습이었는지조차 기억이 잘 나질 않았다.


그때 상하이행 티켓을 끊었다. 어디로든 잠시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상하이에 사는 친구가 며칠 재워주겠다고 했다.     


첼시에게 연락을 한 건 순전히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갑자기 보고 싶었다. 새벽이었고, 잠이 오지 않아서 별생각을 다 하다가 2년간 잊고 지냈던 이름이 떠올라서 문자를 보냈다. 공교롭게도 첼시도 깨어있었다. 나는 상하이에 갈 계획을 말했고, 며칠 뒤에 그녀는 자신이 타고 올 비행기 편명을 보내왔다.     


생각해보니 상하이는 한국과 홍콩의 중간지점이었다. 




4월 초중순부터 유럽 여행기가 연재됩니다. 브런치가 아니라 여기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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