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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님말고 Mar 23. 2019

상하이에서. #1

다섯 명의 사람들, 그리고 또 한 명.

3월 15일부터 4박 5일 동안 상하이에 다녀온 기록이다.  
관광지가 아닌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아주 사적인 이야기다.
때문에 이건 여행기라기보다는 일기에 가깝다.
하지만 떠나지 않았더라면 쓸 수 없었을 일기다.





프롤로그: 이륙


아무리 생각해도 멍청한 짓이다. 상하이에 가는 건. 내가 왜 간다고 했을까. 그것도 충동적으로. 유럽에 가게 될 줄 알았더라면 상하이행 표를 끊지도 않았을 것이다. 당장 유럽 갈 돈도 없는데. 게다가 한 시간 반 걸려서 중국에 가는 건 여행처럼 느껴지지도 않는다. 낯설지도 않은 나라. 미세먼지도 심한 나라. 나이 먹고도 언제든 갈 수 있는 나라. 가지 않을 이유만 가득했고, 가야 할 이유는 하나뿐이었는데 그것마저 이젠 확실치가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기대하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까. 유리창 밖에 떠가는 구름 사이로 내 얼굴이 흐릿하게 비쳤다. 너무 흐릿해서 내 얼굴이 맞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2019.03.15

첫 번째 사람

상하이 공항 세관에 줄을 서 있을 때에도 해외에 온 기분이 들지 않았다. '비자가 필요한 제주도' 정도? 심지어 앞뒤로 한국 사람들이 서 있어서, 제주도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등 뒤에서 우당탕탕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40명은 되어 보이는 중국인 무리가 나를 향해 우르르 달려오고 있었다! 바퀴에 불이 붙도록 캐리어를 끌고 돌진해오더니 내가 서있는 줄 사이사이의 빈틈을 찾아서 메꿔버렸다. 순식간에 내 앞뒤로 중국인이 서게 됐다. 줄이 두 배로 길어졌다. 중공군과 같은 기세로 밀려들어와 삼투합 현상이 일어나듯이, 물방울이 다른 물방울과 하나가 되듯이 자연스럽게 새치기를 하는 사람들. 아, 여기는 중국이었다.



두 번째 사람

내가 얼마나 대책이 없는 인간이냐면, 혹은 얼마나 성의 없이 상하이에 왔냐면, 세관을 통과하고 보니까 숙소에 갈 줄을 몰랐다. 가는 법을 알아내고 지하철 카드를 사려고 보니까 환율이 얼마인지를 몰랐다. 대충 한국 돈으로 이 정도면 남겠거니 하고 환전을 해 온 참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직원들에게 물어볼 것들이 많았는데... 영어가 안 통했다!


지하철을 타려고 하는데 카드가 말을 안 들어서 "이거 어떡해요?" 물어보니까 "NO!!!!"라는 답이 돌아왔다. 도대체 뭐가 "NO"라는 걸까... "뭐가 노우라는 거예요?" 했더니 "NO!!!!"란다. 그 "NO"에 상당한 위압감이 느껴져서 나는 잔뜩 주눅이 들었다. 내가 뭘 잘못했나... 직원이 귀찮다는 듯한 표정으로 게이트 통과를 도와줬다. 얼마나 세게 팔을 붙잡는지 처음엔 잘못을 저질러서 끌려가는 줄 알았다.


우리나라에서도 지하철 문이 닫히기 전에는 "문이 닫힙니다"하면서 경고음이 나는데, 중국도 마찬가지다. 다만 그 경고음이 믿을 수 없을 만큼 크고 사납다. 힘껏 호루라기를 불듯이 삑!!!!!!!! 소리가 나는데, 나는 자리에 앉다가 아까 그 직원이 나를 잡으러 온 줄 알고 화들짝 놀라버렸다.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 직원이 날 무임승차시켰다는 걸 알았다. 말이 안 통하니까 그냥 통과시킨 모양인데, 목적지에 있는 직원에게 그걸 중국어로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무사히 게이트를 통과하기 위해서 네 번쯤 "NO!!!!"를 더 들어야 했다.



세 번째 사람

구글 지도가 안 되니까 지하철에서 급하게 지도 앱을 하나 깔았는데 온통 중국어라서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혼자 만져봤지만 답이 나오질 않았다. 이럴 땐 내가 유일하게 잘하는 것을 해야 한다. 질문하기. 옆에 3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여성분이 앉아 계셨는데 조심스레 말을 걸었더니 영어를 약간 한다고 하셨다. 지도 앱에 언어를 바꿀 수 있는 기능이 있는지 확인해달라고 부탁드렸다. 흔쾌히 끄덕끄덕!


그러더니 보란 듯이 휴대폰 언어 설정을 중국어로 바꾸셨다.....


내 표정을 보고 무언가 잘못됐다고 느끼셨는지, 여성분께서 어디론가 전화를 거셨다. 그와 동시에 지하철 칸 저 쪽 끝에서 정장을 입은 남자가 일어나서 다가왔다. 오빠였다! 오빠는 휴대폰을 다시 한국어로 돌리는 데에는 성공하셨는데, 지도 앱에서는 결국 실패하셨다. 실패한 오빠는 또 전화를 거셨고, 이번엔 반대편 끝에 앉아있던 여자가 전화를 받고 걸어오셨다. 아내였다! 설마 이 칸의 승객들이 전부 한 가족은 아니겠지...! 아내분은 실패하셨지만 전화를 걸진 않으셨다. 그게 내심 얼마나 아쉽던지.


우리는 지도 앱을 포기한 채 영어와 중국어를 섞어가며 힘겹게 대화를 나눴다. 친절한 분들이셨다. 지하철 직원 아저씨가 나 괴롭혔다고 이르면 자상하게 위로해 줄 것 같았지만 간신히 참았다. 나보다 두 정거장 먼저 내리셨는데, 인사를 하시고는 주변을 둘러보며 누군가를 부르셨다. 그랬더니 서로 다른 곳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손녀가 벌떡 일어났다! 앗싸 여섯 식구!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좋은 분들이셨다.



네 번째 사람

나는 관광객들이 찾는 식당을 특별히 찾아다니는 편은 아니다. 대신 이 때도 유일하게 잘하는 것을 한다. 물어보기. 보통은 숙소 직원한테 "점심시간에 어디서 드세요?"라고 물어보고 그곳에 가는데, 이번에는 양고기 쌀국수(인 것 같았다 한문을 봤을 땐)를 먹으러 갔다.


관광객이 찾지 않는 식당에 가면 과도한 관심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곳도 주문을 하는 순간부터 식당에서 일하시는 세 명의 아주머니와 한 명의 아저씨가 나를 은근히 관찰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의 눈길이 나를 향하면 보통 느낌이 있으니까. 매운 양념 같은 게 보여서 국수에 듬뿍 뿌렸을 땐 네 분이 동시에 "헉!"하시는 게 느껴졌다.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너무 매워서 혀가 불타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네 분이 태스크포스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분은 대접을, 다른 한 분은 국자를 가져오셨다. 세 번째 분은 그걸 받아서 국물에 떠다니는 양념을 대접에 덜어내셨고, 마지막 분은 맑은 육수를 가져와서 다시 부어주셨다. 순식간에 혀에 붙은 불이 꺼졌다. 어쨌든 날 주시하고 계셨던 건 맞았던 셈이다. 내가 보기 드문 외국인이라서 주시한 건지, 외국인들이 자꾸만 양념을 퍼부어대서 주시한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말이 안 통하니 물어볼 수도 없고.



다섯 번째 사람

물론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에서는 영어가 통한다. 우연히 발견한 거대 스타벅스의 직원들은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거대한 돔 지붕을 가진 매장인데, 줄을 서야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명소였다. 오랜만에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어서 신이 난 나는 한 직원에게 가서 "매장이 엄청 크네요"하고 말을 걸었다. 그랬더니 주변을 휘이 둘러보시면서 "어마어마하죠!" 하시는데 초성부터 종성까지 자부심이 가득했다. 하지만 "여기가 아시아에서 가장 큰 매장이라거나, 뭐 그런 건가요?"하고 물었더니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지시면서


"이젠... 아니에요. 지난달에 도쿄에.... 더 큰 매장이...."


우...울지 마세요.... 진심으로 상심하신 것 같아서 죄송한 맘이 들었다. 대신 가서 도쿄 스타벅스를 혼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어서 대신 쿠키를 하나 사 먹었다. 맛있다고 했더니 직원분이 다시 해맑게 웃으면서 "우리 쿠키 진짜 맛있죠!!!" 하시는 거였다! 이렇게 귀엽고 열성적인 직원이 있다니... 윽. 못 참고 이모티콘을 하나 써야겠다.



그리고 또 한 명

밤늦게 숙소로 돌아왔을 땐 여러모로 복잡해져 있었다. 메뉴판을 못 읽어서 저녁 메뉴가 되어 버린 개구리가 폴짝대는 것 같아서 뱃속이 복잡했고, 아침에 비행기를 탈 때에 했던 생각이 다시 찾아오면서 머릿속이 복잡했다. 곧 도착할 것이다. 그렇게 보고 싶더니, 이젠 만나기가 싫다. 지하철의 대가족이나 식당의 태스크포스팀, 스타벅스의 귀여운 직원만 만나고 가면 참 좋은 여행이 될 것 같은데.


다시 생각해도 멍청한 짓이었다. 상하이에 온 건. 처음엔 그저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을 뿐이었다. 모든 것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렇게 가까이 와버렸지. 돌이켜보면, 사실 나는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은 게 아니었다. 누구에게든 안기고 싶은 것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상하이까지 가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잠이 들기 위해 애를 썼다. 잠시나마 눈을 붙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두 시간쯤 뒤면 문을 두드릴 것이다.




4월 초중순부터 유럽 여행기가 연재됩니다. 바로 여기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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