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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통역사 Sep 23. 2020

너네는 왜 이렇게 머리카락이 떨어지냐?

시력 이쩜영이라는 형벌

“너네는 왜 이렇게 머리카락이 떨어지냐?”

아빠가 방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노란 박스테이프로 연신 쩍쩍 주으며 푸념한다. 우리 집에 유일하게 남자이자 청소하는 자인 아빠는 웬만한 여자 저리 가라로 집안을 청소했다. 집의 깔끔도로만 따진다면 엄마의 부재를 느낄 수 없을 만큼이었다. 대체 할머니는 자식들을 얼마나 깔끔하게 키우신 걸까. 왜 그렇게까지 깔끔하게 키우셔서 내가 지금껏 머리카락 강박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
 

머리카락이 줄줄 떨어지는 이유에 대해 묻는 아빠의 시력은 2.0이다. 그건 방에 서 있어도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의 개수를 알아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시력이기에 아빠는 우리가 자라는 내내 박스 테이프를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노란 박스테이프를 테이프 둘레만큼 뜯어내어 끈적한 면이 겉 부분으로 둘러지도록 붙여 놓으면 어디서고 머리카락을 제거할 수 있는 '만능 털 청소기'가 되었다. 방바닥 위를 쩍쩍 소리를 내며 머리카락을 제거하다 보면 어느새 끈적이는 면은 채워지고, 테이프는 머리카락으로 인해 접착력을 잃을 때까지 열일을 하다 장렬히 전사하곤 했다.
 

우리 집 방바닥에서 열일을 하던 건 박스 테이프뿐만이 아니었다. 집에는 핸디형 청소기도 있었는데, 두 말할 것 없이 머리카락의 성장주기가 지나치게 빠른 두 여자아이들의 그것을 줍기 위한 것이었다. 더불어 아이들의 부주의한 손놀림으로 과자 가루라도 바닥에 흘리게 되면 핸디형 청소기는 어디서고 나타나 상황을 마무리하는 유능함을 보였다.
 

아빠나 고모들이나 뭔가를 흘리는데 지나치게 민감했다. 민감한 모습을 보자니 내 손은 더 떨려왔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접시를 들고 다니다 떨어뜨리는 날엔 넌 왜 이렇게 손이 야물지를 못하니! 류의 비난 섞인 말들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전형적인 악순환으로, 혼이 나니 떨리고 떨리니 떨어뜨리는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후엔 나도 나를 믿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 급기야 스스로를 흘림 증후군으로 명명하기도 했다.
 

그렇게 내 자식에겐 이런 어려움을 주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2.0 시력의 나 역시 굴레를 벗어나지 못 한 채 ‘눈이 좋다는 건 형벌이야!’를 외치며 딸과 남편을 향한 잔소리를 달고 산다. 세대를 이어 물려받은 청소에 대한 운명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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