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이 Sep 23. 2024

써내리려는 결심

어릴 적 나의 꿈은 ‘행복’이었다. 고등학생 때는 어려웠던 환경이었었지만 불행하다고 여기진 않았다. 하지만 행복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저 막연한 행복추구가 인생의 목표였다. 그렇게 자라나 20대 초반 누적되었던 불안정함이 폭발해 비관적인 사람이 되었다. 사람의 행, 불행은 주어진 환경과 처해진 상황이 정해준다고 여겼고 늘 좋기만 하지 않은 현실은 내 비관을 증명해 줬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20대 중반이 되었다. 우주의 기운이 그 생각에서 벗어나라는 듯이 나는 가까운 사람들의 도움에 힘입어 책방을 창업했다. 그리고 내 세계는 뒤집혔다. 내향형 인간이었던 나는 2년간의 시간 동안 인생에 없을 많은 사람들에 대해 알게 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대화했다. 그 모든 과정이 즐거웠다. 새로움은 두려움이 아닌 즐거움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렇게 직업만족도가 매우 높았다. 하지만 재계약이 다가오며 현실적인 문제에 속절없이 무릎 꿇었고 책방 문을 닫게 되었다. 책방을 정리하며 나는 결심했다. 다시 책방을 열겠다. 지속가능한 그리고 내 삶과 깊게 연결된 책방을 열기로 결심하며 문을 닫았고 곧바로 취직을 했다. 많은 면이 바뀌어버린 나는 어렵지 않게 사람들과 잘 지내게 되었다.


현실은 그렇듯 늘 좋기만 한 것도 늘 나쁘기만 한 것도 없었지만 3개월이 되던 즈음에 나는 휘둘리기 시작했다. 상대의 행동과 감정적인 말에 나를 휘둘리게 둘 수 없었다. 나를 향한 것이 아닐 수 있는 말은 나를 향하는 것 같았고 스스로 살을 붙여 대는 것이다. 이것은 부정적인 신호였다. 부유하던 생각과 온몸으로 체감하던 감정들이 나를 잡아먹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일기를 쓰게 되었다. 과도한 감정과 생각들을 그곳에 덜어내기 위함이었다. 쓰고 나면 제삼자가 되어 바라볼 수 있고 글을 읽어 내림으로서 나와 분리할 수 있었다. 감정과 생각들이 동일시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수치이상의 감정과 생각들은 나를 갉아먹기 때문에 일기를 쓰는 행위는 어쩌면 스스로를 구하는 행위가 된다. 나의 첫 글쓰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렇게 일기를 쓰고 나니 삶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표가 생겼다. ’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하며 살고 싶은가?‘ ’ 나는 어떤 것이 옳다고 여기며 살 것인가?‘ ’ 내가 궁금하고 지키고 싶은 취향은 무엇인가?‘ (…) 사실 이런 질문들을 가까운 이에게 자주 묻곤 한다. 묻는 이유는 나는 명확하게 지향하는 바가 없는데 당신은 어떤 태도를 취하며 살아왔고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듣는다는 건 나에겐 즐거운 일이었다. 삶에 대한 나만의 철직을 세우는 것은 오랜 바람이다. 나답게 사는 것이 제일 어렵고 선택의 상황을 극도로 어려워하는 나에게 늘 의문이 있었다. ‘왜 선택을 잘 못하지?’ ‘선택하지 않은 가능세계에 왜 집착하지?’ ‘타인의 감정과 말에 쉽게 휩쓸리지?’ 하는 의문. 이 의문들은 결국 나를 잘 알지 못한다는 결론으로 귀결되었다. 내가 어떤 태도를 지니며 살 것인지, 어떤 선택이 옳다고 여길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두고두고 옆에 두고 싶은 취향은 무엇인지도 어렴풋이라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젠 쌓인 물음표를 마침표로 나열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자가 되려 한다. 그 질문에 대답하는 자가 되어 써내리려는 것이다. 이젠 마침표를 쌓아보려고 한다. 이렇게 나는 써내리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