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건대, 내게 독서란 줄거리를 구성하는 쪽에 가까웠고, 따라서 문장을 읽는다기보다 책 한 권을 읽어낸다는 편이었다. 많은 문장이 이해되지 못한 채로 읽혀졌었고 뜻을 알지 못하는 단어와 문장을 읽으며 알지 못한다는 자각도 없이 그냥 읽어내리는 습관적 읽기였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학기초 모임 구성이 한창일 때 곰같이 생긴 학생이 독서사랑, 줄여서 독사 모임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외모를 한참 중요하게 여기던 시기에 곰에게 받은 제안을 단번에 수락할만큼 성숙하지 못했고 독서를 사랑하는지 알 수 없어 몇번 고사했는데, 그 친구는 독사같이 물고서 놓지않는 성격이었고 결국 우리반에서 책상머리에 앉아 책이나 읽을 것 같은 남학생 다수를 포섭해냈다.
습관적 읽기에도 책을 읽는 것이 좋았던 것은, 생각이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순간이 문득 찾아오고 그걸 나의 언어로 재구성하는 작업이 꽤 의미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이 아닌 문장을 읽는다는 자각은 한참 후에나 생겨났는데, 시를 쓰는 만큼 단어를 고르고 문장 하나하나를 뽑아내는 작가의 노고를 떠올리면 예전처럼 허투루 읽어갈 수가 없었다. 책을 읽을 때 생각은 작가의 말투로 떠올랐다. 류시화를 읽을 때와 기형도를 읽을 때 내 글의 말투가 달랐다.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김훈 칼의 노래를 읽고 있다. 남한산성에서도 칼의 노래에서도 문장의 밀도가 촘촘해서 처음 읽는 속도가 늦다가, 현대 외래어라고는 한 단어도 없이 이어지는 문장의 파도에 쓸려 다시 책 읽듯 읽어가고 있다. 하루하루 살아가다가도 가끔 과거 이야기를 적어놓지 않으면 삶이 너무 미래로만 지향하다 그대로 사라질 것 같아서, 두려움으로 쓴다.
@230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