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시골드 Jan 03. 2023

남편의 다섯 번째 첫 출근

마흔에 첫 출근, 화이팅!

올해로 남편 나이 마흔이 되었다.

그리고 새해 3일째, 새로운 회사로 첫 출근을 하였다. 남편의 인생에서 다섯 번째 회사다.




첫 직장은 경남 사천 시골마을에 있었던 중견기업 규모의 조선소였다. 조선해양공학을 전공한 남편은 자연스레 조선소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고, 우리는 결혼 후 사천의 작은 아파트에서 신혼을 시작했다. 곧 아이가 태어났고 우리 세 식구는 작지만 아름다운 시골 생활을 즐겼다.


그러다 갑자기 조선 경기가 악화되면서 작은 조선소들이 문을 닫기 시작했고, 급기야 남편의 첫 직장도 사라졌다. 사라지기 직전 희망퇴직으로 회사를 나와서 경남 김해에서 두 번째 직장을 다니게 되었다. 훨씬 규모도 작고 체계도 없는 회사였지만 우리 세 식구를 부양하기 위해 남편은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거다.


그런데 그 회사는 생각보다 훨씬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근무환경도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너무 힘들었다. 회사에서 갑자기 전남으로 장기출장을 보내 우리는 생이별을 하기도 했다. 남편의 스트레스가 심해지자 나도 힘들어졌고, 갓난쟁이 둘째를 키우고 있는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시간들이었다. 남편도 가장으로서의 무게만으로 견뎌내기엔 투머치였을 것이다.


둘째 돌을 두 달 앞둔 시점에 우리는 큰 결심을 했다.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살고 보자는 선택이었다. 두 번째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때 남편의 건강이 무조건 1번이라며 회사를 나오자고 부추겼던(?!) 나의 무대뽀 지지에 대해 지금까지도 남편이 고마워한다.


그렇게 우리는 석 달 동안 아무 수입이 없이 지냈다. 돌이 안된 둘째를 두고 내가 직장을 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실업급여로 근근이 살아냈던 것 같다. 아, 그리고 중간에 둘째의 돌잔치가 있었다. 직장을 다닐 때 예약해 둔 행사라 취소하지 못하고 진행했는데 돌잔치 때 받은 선물과 축하금으로 또 생활했던 것 같다.


이젠 더 이상 수입 없이 살아가기 힘들어졌을 때, 창원에 있는 세 번째 직장을 구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갔다. 회사 규모는 커졌지만 기존에 하던 일과 분야도 달랐고, 업무 컨디션은 더 안 좋아졌다.


그곳을 벗어나고 싶어 발버둥 치며 이직을 준비하던 남편이 부산 기장에 있는 회사로 옮기게 되었다. 그렇게 네 번째 회사에서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그것이 4년 반 전이다.


다행히 네 번째 회사는 복지도 사람들도 근무환경도 괜찮았다. 아니 그 전 회사들에 비하면 너무 좋았다. 웬만하면 여섯 시 칼퇴가 보장되었기에 김해까지 한 시간 가까운 출퇴근도 할만했다.


우리는 꽤 안정적인 생활을 했다. 경제적으로는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먹고살만해지니 그동안 숨어있던 다양한 이슈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고 부부갈등이 극에 달하기도 했다. 그것들을 해결하느라 바쁜 와중에 회사가 점점 어려워졌다. 이 회사에서는 비전이 없다는 걸 깨닫고 이직을 꾀하던 중, 헤드헌터로부터 연락이 왔다.


제안이 들어온 자리는 전기차 배터리를 만드는 독일 회사에 관리자 역할이었다. 남편은 용접이라는 낯선 영역이고 다른 분야의 일이라 처음엔 망설였다. 하지만 도전하기로 했고, 네 번째 회사에서 영어를 지속적으로 써 온 것이 이번 회사 3번의 면접에서 좋은 영향을 미쳐 합격하게 되었다.


신사업에 투입되는 인력이라 일이 얼마나 빡셀지, 근무지가 어디로 튈지 사실 알 수 없다. 하지만 남편은 안주보다 도전을 선택했다.


오늘,

마흔이 되어 다섯 번째 회사로 첫 출근하는 남편은 그 어느 때보다 긴장되어 보였다. 나는 연신 “잘할 거야!”를 외치며 졸졸 따라다녔다. 이직 기념으로 산 옷을 깔끔하게 잘 차려입고 현관을 나서며 “많이 긴장되네. 이게 다 당신 덕분이다.”라며 손하트를 날려주는 남편이다. 꼭 듣고 싶었던 강의를 포기하고 남편의 첫 출근 장면을 함께 하기로 한 건 참 잘한 선택이었다고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싶다.




마흔에 첫 출근이라니,

얼마나 긴장되고 떨리고 설렐까.


여러 직장에서 다양한 경험들을 했기에 두 번째 스무 살의 도전은 설레고 기대되지만은 않을 거다. 많이 걱정되고 불안하기도 할 거다.



네 번의 이직, 다섯 개의 직장을 거치는 동안 우리 아이들은 열한 살, 여덟 살이 되었고, 나는 엄마성장연구소라는 나만의 사업을 키워왔다. 결혼 9년 만에 우리 네 식구 보금자리 내 집마련을 했다. 이게 모두 남편이 (거의) 쉬지 않고 더럽고 치사해도 버티고 버티며 우리 가족을 위해 헌신해 주었기에 가능했다. 이제는 남편도 가족을 위한 희생과 헌신보다 자신의 커리어와 비전을 위해 날아오를 수 있도록 나도 올해는 같이 더 힘을 내봐야겠다!



이번 회사가 마지막이 될지 어떨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아빠이자 남편으로 살면서도 자신의 커리어에 대해 욕심부리며 자기만의 속도로 나아가는 남편을 존경한다. 참 감사하고 참 대단하다.


2010년 처음 만난 연애 때부터 지금까지 다섯 번의 회사 첫 출근을 함께 해온 나도 참 대견하다. 애썼다. 잘해왔고, 잘할 것이다.


우리의 멋진 두 번째 스무 살을 응원하며!

사랑해 여보:)




작가의 이전글 [롤모델 인터뷰 4] 콘텐츠 사업가 신태순 대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