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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경 Jan 12. 2024

무라카미 하루키가 내 귀를 깨물었다

[김유경의 책씻이]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하루키는 잘난 이야기꾼이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스토리라인이 매우 단순해서 주인공 ‘나’의 일상 변화가 거의 없는데도 읽는 동안 내 의식에 큰 파동을 일으킨다. 심지어 문득문득 내 일상에 끼어들기도 한다. 이를테면, 보지도 않던 내 그림자를 새삼 확인하게 된다거나, 자꾸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려 한다거나, 해야 할 일과 하고픈 일을 구분하게 된다거나 하는 식이다.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무의식과 동떨어진 자아로 무리 없이 살다가 미세한 불편감에도 예민해져 자아 너머를 들여다보는 격이다.     

 

보통 자아라 하면 사회적 자아를 일컫는다. 통념에서 자유롭지 않은 주체다. 그러기에 이 소설이 얘기하는 본체와 그림자의 분리는, 가시적 본체가 의식(자아)이고 어두운 영역의 그림자가 비가시적 무의식적 자아라 할 수 있다. 통제 불능인 무의식을 마음이라 할 때, 17살 소년 ‘나’가 첫사랑 16살 소녀를 만나는 1부에서 마음이 일으키는 첫 번째 블랙홀이 등장한다. 본체와 그림자 중 어느 것이 지금 이곳의 자신(몸)인지를 자문하던 소녀가 홀연 사라져서다. 그 사라짐(블랙홀)은 3부의 옐로 서브마린 소년에게도, 2부의 ‘나’에게도 일어난다(생긴다).     


믿거나 말거나 류의 이런 소설적 사건이 내겐 그럴싸하고 흥미롭다, 소녀의 도시 얘기를 기록했던 소년이 40대 중년이 되어서도 첫사랑 소녀를 못 잊어 그 도시로 들어선다. 규율에 따라 그림자를 떼어 놓은 채. 1부의 16살 소녀가 있는 도서관에서 일하려고 눈에 상처를 내면서까지. 어두워야 도시를 나다닐 수 있는 ‘나’가 되어. 그건 ‘나’가 그림자 되기를 자처한 것이다. 그러니까 2부에서 도시 밖으로 떠나보낸 그림자는 3부에서 본체 역할을 하는 ‘나’, 즉 도서관장인 셈이다. 한편 도시에 남은 ‘나’는 도서관에서 “오래된 꿈”을 읽는 일이 더디고 버겁다.    


       

“내 의식과 내 마음 사이에는 깊은 골이 있었다.”(754쪽)       


   

작가는 1980년에 발표한 중편 소설을 사십 년 만인 2020년에 장편으로 개쟉한다. 그는 본체와 그림자의 분리, 본체와 그림자의 합체, 그림자(본체)와 그림자(본체)의 일체 같은 추상적 현상을, 대도시에서 도서 유통업에 종사하던 ‘나’가 돌연 사퇴하고 산간 마을의 도서관장으로 삶터를 옮기는 단순한 동선 변화 속에 구체적 현상처럼 삽입해 각인시킨다. 거기에는 도시 안팎에서 유사하게 펼쳐지는 반복적 장면들이 한몫한다. ‘나’의 산책길과, 장작불을 지핀 도서관 풍경 같은. 전 도서관장 고야쓰 씨의 영혼과 도시에서 만난 노인의 역할이 내게 오버랩되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림자와 본체는 아마 서로 교체되기도 할 겁니다. 역할을 교환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본체가 됐건 그림자가 됐건 당신은 당신입니다. 그 사실은 틀림이 없어요. 어느 쪽이 본체고 어느 쪽이 그림자인가를 따지기보다, 각자 서로의 소중한 분신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오히려 맞을지도 몰라요.” (752쪽)   


        

결국 ‘나’는 귀를 깨문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나’를 계승해 “오래된 꿈”을 읽게 한다. 도시 밖 그림자와의 합체를 꾀한 거다. 도시 밖에는 16살 소녀를 계승한 듯한 카페 여주인도 있다. ‘나’에게 곁을 주면서도 성욕에 대한 방어적 태도를 견지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작가는 '나'가 첫사랑의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면서도 새로운 사랑에 열려 있는 것으로 소설을 마친 셈이다. 본체(의식)와 그림자(마음)의 조화다. 70이 넘은 작가가 새삼 그걸 짚어 보인 게 인상적이다. 덕분에 나 또한 마음의 소리에 한껏 귀기울이게 되었다. 무의식 영역은 청자의 청력에 맞춤한 비정형으로 말도 하니까. 


자아의 자기실현 응시를 흥미롭게 선보였으니 '무라카미 하루키가 내 귀를 깨물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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