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가정은 둘째가 태어난 이후 지금까지 약 3년정도 계속 외벌이었답니다. 그러다보니 종종 이런 질문을 받곤 합니다. ‘아이가 둘인데 외벌이로 살면 많이 쪼들리지 않느냐.’라고 말이죠. 그럴 때면 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맞벌이 할 때 보다는 경제적으로는 좀 더 쪼들리는 것이 맞다. 어찌 안 그렇겠느냐.' 그렇지만 경제적인 측면을 제외한다면 예전보다 지금이 훨씬 더 풍요롭습니다.
사실 저는 돈을 참 좋아합니다. 아이를 제 부모님께 맡기고 돈을 버는 것이 훨씬 좋다 생각하며 살아왔지요. 어린 아이에게는 돈보다 부모가 더 소중하다는 이야기에 저는 매우 공감합니다. 그럼에도 외벌이로는 답이 없다는 생각을 하며 지금껏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외벌이로 살고 있지요. 오늘은 제가 외벌이를 결심하게 만든 제 가슴 속 이야기를 털어놓으려고 해요.
첫째가 태어난 이후 여느 가정처럼 저희는부모님께 아이를 부탁드리고 맞벌이로 돈을 벌었습니다. 아내는 대학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했는데 제 기억엔 업무강도가 꽤나 쎗던 것 같아요. 매일 새벽같이 출근해 종일 꽉 들어찬 수술일정을 소화하는 걸로 봐서는요. 일과를 마치고 나면 몸도 마음도 지쳐 귀가 후 넝마처럼 쓰러져 자는게
일상이었으니 더 말 할 필요가 없겠지요. 온갖 직업병을 달고 사는 건 당연한 일이구요.
사실 저희 부부는 첫째를 키우면서 너무너무 고생을 많이 했엇어요. 그때 당시 제가 취준생 신분이었던지라
첫째가 태어난 이후 돌잔치까지 제가 육아를 거의 전담했었지요. 아무것도 모르는 아빠의 첫 육아라 생각만해도 가슴이 답답하지 않으신가요? 첫째를 키웟던 그 시절이 저에게는 유독 더 힘들었던 기억으로 남아있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 부부는 ‘애는 하나면 족하다.’며 둘째는 놓지 않기로 암묵적 합의를 했었지요.
그런데 부모맘이라는 것이 참 희한하더군요. 아이가 조금씩 크면서 힘든 시기가 지나가고 자꾸자꾸 이쁜 짓을 하기 시작하는거에요. 그걸 계속 보다보니 내 안에 쌓여있던 예전의 그 힘든 기억들이 조금씩 사라지는걸 느꼇습니다. 암묵적 합의가 효력을 서서히 잃기 시작하더군요. 어느 시점부턴가 자연스레 피임을 멈추게 되었고 감사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둘째가 들어섰습니다.
첫째를 가졌을 때 아내가 굉장히 조심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병원 의료장비 중에 방사능 수치가 강한 것들이 좀 많다고 해요. 그래서 방사능 차단 앞치마같은 걸 지원받아 착용한 채로 일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더군요. 또 업무강도가 워낙 세다보니 유산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마 그 일이 우리 부부에게 일어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었지요.
둘째를 가지고 얼마 안 된 때로 기억합니다. 소위 정말 조심해야 한다는 임신 초기이지요. 아내가 나이트 근무를 며칠 연속으로 서더니 갑작스레 몸이 안 좋다며 휴가를 쓰더군요. 그리고는 자꾸 하혈이 나온다고, 느낌이 안 좋다는 이야기를 계속 했습니다.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더군요. 의료지식이 좀 있다보니 자기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안 것 같았어요. 꼭 그런게 아니더라도 엄마의 직감은 이상하리만큼 정확할 때가 많지요. 아니나 다를까
집사람이 다음날 산부인과에 다녀오더니 아이가 유산되었다는 소견을 받아왔습니다.
아이가 유산되었다는 소견을 받아 온 그 날, 저는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해 늘 그래왔던 것처럼 정신줄을 놓은 채 일에 파묻혀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뜸 아내에게서 전화가 와서는 ‘유산으로 2주간 병가를 받게 되었고, 지금은 집에서 쉬고 있다.’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지요.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유산이 아내에게 어떤 의미인지 어떤 무게감을 가진 것인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요. 알았다면 급하게 연차를 내고 당장 집으로 달려갔을텐데.
오늘은 야근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일찍 퇴근했습니다.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서니 조명이 하나도 켜져있지 않더군요. 오늘따라 집이 어두운 동굴같이 느껴졌어요. 아내는 힘없이 침대에 누워 있었어요. 이때까지만 해도 저는 ‘유산의 휴유증 때문에 몸이 많이 안 좋은가보다.’라고만 생각했엇죠. 돌이켜보면 저는 유산을 좀 더 고통스러운 생리통 정도로 여겼나봅니다.
가까이 다가가 집사람을 꼭 안았는데 갑자기 눈물을 터뜨리더군요. “아이를 지켜주지 못해 너무 미안하다.
내가 조금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힘들면 바로 쉬었어야 했는데. 일 그까짓 게 뭐라고. 내가 아이를 죽인 것만 같다.” 그제서야 저는 유산이 아내에게 어떤 무게감을 가지는지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조금씩 분열하고 있는, 인간이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의 작은 세포덩어리. 그렇지만 제 아내에겐 이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이었나 봅니다. 아내는 내 자식이 죽어 하늘나라로 간 것만 같은 가슴 메어지는 아픔에 몸부림 치고 있었습니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라는 그 말이, 그제서야 제 가슴에도 사무쳤습니다
갑작스레 저도 눈물이 나더군요. 아내 가슴 속 가득찬 아이를 향한 미안함과 슬픔, 후회들이 넘쳐흘러 제 가슴속에도 쏟아져 내리는 것 만 같았습니다.
사람이 맘고생을 심하게 하면 가치관이 달라지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아마 저는 이때의 경험이 그런 역할을 했던 것 같습니다. ‘돈이 물론 중요하지만 다른 가치에 좀더 무게를 두는 것도 필요하겠구나.'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로부터 1년 뒤 우리 부부의 몸과 마음에 생긴 상처가 조금이나마 아물었을 무렵 다시 아이가 들어섰습니다. 먼저 하늘로 떠나간, 둘째가 될 뻔 했던 내 아이가 가르쳐준 인생의 교훈 덕일까요. 아내는 고민 끝에 8년간 다녔던 병원을 그만두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지금 우리 부부는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지금껏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삶의 모습들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외벌이의 길을 선택한 것이 그저 아이 때문만은 아닙니다. 외벌이를 처음 제안한 것은 저였는데 그건 아내가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 끝에 나온 결과물에 가깝답니다. 아이를 위해 돈을 포기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면 돈을 사랑하는 제가 외벌이를 결정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아이의 행복에 앞서
부모의 행복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직장에 치여 꿈을 꾸는 것조차 사치로 여겨온 아내가 직장을 그만 둔 지금은 새로운 삶이 열렸다 고백하고 자신의 꿈을 이루는 상상을 하며 잠드는 걸 보면 괜스레 제가 더 설레입니다.
지금은 갑작스런 제 육아휴직으로 아내가 다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시 복직하고 나면 아내는 다시 일을 그만두고 자기에게 주어질 자유로운 시간들을 활용해 자신이 꿈꿔왓던 가슴뛰는 무엇인가를 할 거라고 해요. 그간 해보고 싶었는데 못해본 일들에 도전할거라네요. 이런 꿈의 회복또한 외벌이로 보낸 지난 3년간의 시간들이 만들어낸 변화라 생각해요.
이것이 잠시잠깐 우리 가정에 왔다간 그 아이가 우리에게 쥐어준 준 소중한 선물이 아닐까요. 그 순간엔 비록 아프고 힘들었지만 그 아픔을 통해 우리 부부의 생각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고 바뀐 행동이 삶으로 녹여나오는 과정들 덕에 인생의 방향이 새롭게 쓰여졌으니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