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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몬 베유 May 12. 2024

이토록 다른 모양의 사랑 (2)


우리는 그렇게 배우지 않았어요.


이야기의 장소를 잠깐 100년 이상된 카페로 옮겨본다. 9시가 넘은 시각, 카페 시네마의 엔틱 한 테이블엔 베를린에서 꽤 오래 거주하신 어느 작가분과 베를린 여행인 그리고 작가분의 지인 두 분이 앉아있다. 베를린 여행객은 묻는다. “베를린엔 낙서가 많은데 어떤 이유 때문인가요?”. 작가분은 여러 이야기에 거쳐 독일 난민 이야기를 꺼낸다. “독일에서 난민을 반대했을 때 벽에 이렇게 적었어요. 우리는 그렇게 배우지 않았어요.”라고.


우리는 그렇게 배우지 않았다-. 여기서 그렇게-라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아무래도 도시에 홀로코스트 박물관, 나치 박물관등을 설립하여 차별과 평등에 대해 배운 그 교육을 말하는 것 같다. 한 사람이 사람으로서 설 수 없었던 역사를 독일인들은 배우고 기억한다. 어떤 사람이라도 차별할 수 없다는 점을 베를린 사람들은 배우고 기억한다. 동양인이라고, 장애인이라고, 춤을 출 자유가 없지 않음을 그들은 기억한다. 그 이전에 그들 모두 사람임을 그들은 배우고 기억한다. 그들은 그렇게 배우지 않았다.


휠체어가 클럽에 들어오고 내가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춤을 출 수 있었던 것은 그렇게 배우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상은 현실로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이질감과 낯선 결로 다가오는 법. 이 평등을 적용한 대화와 방식은 베를린에서 오래 거주하신 작가분과 대화할 때 비로소 몸으로 다가왔으며 나를 사랑의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어줬다. 우리는 모두 공론장에 와있으며 모두 발언할 기회가 있다는 형식은 나에겐 또 다른 배움이었다.


한국 사람들끼리 모여 앉아있다면 충분히 통할만한 업적을 그는 숨겼다. 대화의 주도권을 자신이 쥐고 설득할 수 있었음에도, 함부로 ‘우리’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그의 어투에는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라던가,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가 익숙하게 배어있었는데, 그럼으로써 나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황을 자연스럽게 만들어줬다.


‘우리’라고 묶기 전 상대방의 생각을 묻거나, 상대방의 생각을 감히 추측하지 않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는데, 특히 자신이 베를린에서 오래 살았다고 해서 테이블에서의 모든 이야기를 자신이 가져가지 않는 것도 놀라웠다. 요약하자면 자신이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건, 자신이 어떤 업적을 쌓았건 그리고 상대가 어떤 업적이 있건 모여있는 사람들은 충분히 질문하고, 토론하고, 의견을 말할 수 있었다. 내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건, 얼마큼 돈을 벌건 말할 권리와 힘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모든 이들에게 동등하게 한 표씩 있는 것처럼.


자유는 자유를 이룬다.


3시간의 짧은 대화였지만 나는 꽤 많은 것을 얻었다. 그분에게 배어있는 평등한 대화의 습관은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어가게 끔 했다. 나는 궁금한 것을 질문했고, 의견을 냈고, 시각 역시 어느 쪽으로 조금 변했다. 일방적으로 의견을 이끌어 냈다면 그 사람의 멋있음과 약간의 당혹감만을 남기고 나는 베를린 여행을 마무리했을 것 같다. 


클럽도 마찬가지였다. 멋짐과 매력어필이 전부였다면 나는 자유가 이끄는 어떤 멋진 장면들을 볼 수 있었을까? 나도 여기에 참여했다는 나르시시스틱 한 멜랑꼴리 한 감정과 언젠가 여기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 즐겁고 찝찝한 여행의 장면 하나를 마음속에 가져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기엔 장애인과 노인을 사람으로 보는 인식이 이끈 어떤 장면이 있었다. 음악이 젊은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닌 장면과 비장애인이 가지지 않은 장면이 섞인 어떤 묘한 장면이 있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인간으로서 감동하고 춤을 추는 장면도 있었다.


자유는 새로운 자유를 이룬다. 나는 이제 그것을 조금 믿는 편이다. 한국과 달리 길거리에서 눈만 마주치면 인사를 하던 습관도, 점원에게 말을 걸면 짧게 대화가 시작되던 그 분위기도 사실은 자유가 줬던 어떤 시너지였던 것 같다. 상대를 고객이나 점원 ‘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대화할 수 있는 인간으로 보는 것. 넓게는 이 사람과의 대화가 내 시간을 뺏는다는 시각에서 벗어나는 것. 자유로 나아가면 나쁜 일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쪽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보는 것. 


그리고서 이 이야기들을 한 참을 들여다보고 생각해 보았다. 자유와 평등.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아니 더 정확히는 내 앞에 이런 장면들을 자연스럽게 떨어뜨려놓는 이 방식들은 무엇일까. 오글거리지만 애석하게도 한 단어가 떠올랐는데 그건 사랑이었다. 사랑. 내 상상력은 부족해서 그 단어 밖에 떠오르지를 않았다. 


사랑의 새로운 모양


새로운 장면들은 마라맛 달짝 지근한 사랑의 개념을 흩뜨려놓기 충분했다. 삶이 다르면 사랑의 개념도 다른 법. 확연히 베를린의 삶의 모양은 한국의 모양과 다르다고 판단했는데, 그 간극만큼이나 사랑의 모양도 달랐던 것만 같다. 더 정확히는, 사실 그 단어 말고는 다른 언어로 설명하고 표현하기 어려웠다. 내가 보았던 이 장면들을.


어떤 결과물이 나와야 하고, 시큰해야 하고, 누군갈 위해 보일만큼 희생해야 하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만큼을 사랑이라고 정의했던 나의 작은 상상력은 베를린에서 좀 더 큰 가능성으로 열렸던 것 같다. 어느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나타났던 누군갈 위해 죽는 근대적인 사랑의 모양은 지구 반대편에서 다른 모양으로 더 성숙해졌던 것 같다. 단순히 남녀 간의 사랑에 붙잡혔던 나의 언어는 어느 쪽에서는 스스로 자라나고 확장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둘의 결이 마냥 다르냐고 물어보기엔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사랑이 더 성숙한 논의로 진행될수록 집착적이거나 파괴적인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쪽으로 점점 물러나는 모양새처럼 보인다. 그런 면에서 “사랑은 둘의 무대”라는 알랭 바디우의 사랑론은 점점 한국에서도 나름대로 먹힐만한 주장이 되는 듯 보인다. 


다만 나는 이를 좀 더 큰 모양새로 확장해보고 싶다. 상대방이 어떤 외모를 가지고 있더라도, 어떤 영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다만 한 명의 사람으로 보는 것. 상대방이 어떤 삶을 살아왔더라도, 어느 직급에 있더라도 한 명의 사람으로 보는 것. 발언권을 주고 합리적인 대화를 해나가는 것.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하고 또 당연해서 소금을 넣지 않은 설렁탕의 맛이 나는 모양새이지만 이 역시도 사랑의 모양이겠거니-하는 그런 확장이 일어났다.


물론 이 밋밋한 모양의, 이성적인 모양의 사랑은 참이나 자극적이지 않을 것만 같다. 어떤 재밌는 이야기도 없을 것만 같고, 특이한 사항도 없어 보인다. 아, 무엇보다 도취감이라던가 남는 것이 없어 보일 수도 있다. 너무 당연한 것이라 상대를 이상화하지 않는다. 얼굴과 몸, 분위기, 착장등을 보며 빠져드는 그 사랑에는 얼마나 많은 설렘과 떨림이 있는가. 또 사랑을 받는 입장에서는 얼마나 좋고 자존감이 오르는가. 그 사랑은 충분히 자극적이다. 또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우리 삶을 지탱하는 감정이라기엔 우리가 모두 ‘인간’이라는 점 역시 충분히 필요한 감정 같다. 대화, 평등, 서로를 ‘어떤 것’으로 보지 않는 마음들. 적어도 나는 조금은 자유로워진 것 같다. 상대와 내가 얼마간의 격차가 있든 ‘우리는 모두 사람’이라는 사실이 나를 좀 더 사랑하는 방법처럼 다가왔고, 또한 상대를 사랑하는 방법처럼 다가왔다.


물론 베를린에서 11일 정도 지냈다고 해서 모든 생각을 고쳐먹은 것은 아니다. 또한 사랑에 대해 서술했지만 더듬거리며 언어로 잠깐 잡아놓은 것에 불과하다. 여전히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며, 어느 영역에서는 그 힘과 영향력을 겪어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여전히 익숙해져 있다. 상대가 나보다 많이 버니까 나도 모르게 굽히는 내 모습에 익숙해져 있고, 상대가 나보다 더 많은 업적을 이뤄낸 사람이라면 나도 모르게 굴종한다. 반대로 상대가 나보다 조금 벌면, 조금 알면 나도 모르게 이 구도를 이용할 때가 있다. 뿐만 아니라 나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함부로 ‘우리’로 묶어 버린다.


그렇지만 이런 이런 밍밍함이 당연함을 당연함으로 만드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내가 평등을 ‘사랑’이라는 강한 단어를 쓰는 데에는 적어도 그 정도의 에너지가 필요해서 그런 것 같다. 모두를 평등하게 보게끔 하려면 우리에겐 어떤 힘이 필요하다. 당연함을 당연함으로 만드는 데에는 그 정도의 힘이 필요한 것 같다. 


적어도 나는 밍밍함 사랑도 추구하기를 바라본다. 퇴근 후 냉동실에 있는 김치볶음밥과 깐풍기를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모두를 평등하게 느낄 수 있는 밍밍한 맛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평등의 가치는 설렁탕 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그런데 잠깐, 밍밍한 사랑이 재미가 없나?


평등은 밍밍하지 않다 - 글을 나가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평등이 재미가 없을까? 김수영의 시가 떠오른다. 이름은 ‘사랑의 변주곡’이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 눈을 떴다 감는 기술 - 불란서혁명의 기술  / 최근 우리들이 4.19에서 배운 기술” 김수영은 사랑의 기술로 프랑스혁명과 4.19를 말한다. 


프랑스혁명과 419가 너무 크더라도, 나름대로 평등을 실현하려는 사람에게는 시행착오와 마라맛 고통이 존재한다. 최근 개봉한 ‘서울의 봄’도 천만을 훌쩍 넘는 걸 보면 평등에 대한 감각은 충분히 자극적일만한 소재인 것 같기도 하다. 물론 내가 말하는 평등과 서울의 봄에서 다루는 주제는 많이 다르지만 모두가 공통되어 생각할만한 ‘평등’은 충분히 자극적인 이야기와 말이 될 수 있다.


‘사랑이 둘의 무대가 되려면 자신이 사라져야 한다(사라지는 게 당연하다)’고 바디우는 주장하는 것 같다. 자신이 사라지는 과정에서 고통이 감수되는 것은 필수다. 자신 혼자 서있던 무대에서 상대방의 무대가 늘어난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새로운 방식의 무대와 자유, 연출이 탄생된다. 그것이 고통을 감수한 사람이 낳는 이야기이고, 서사 같다.


사회생활에 조금 더 들어가며 지키고 싶은 것도, 영유하고 싶은 것도 많아졌다. 그렇지만 평등에 대해 싸워보고 싶다. 생각해 보면 남는 것도 없는데 남을 위해 무언 갈 주기 위해 참 치열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줄 수 있을까. 내가 말한 사랑의 모양을 지킬 수 있을까. 아직도 선입견 속에 허우적거리지만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는 있는 것 같다. 지금 당장의 두근거림으로 타인을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큰 의미에서 밍밍한 사랑을 하는 것도 중요하므로. 우리 삶의 당연함들 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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