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몬 베유 Jul 04. 2024

운동은 무너지지 않는 마음을 잡는데 제법이다

운동은 무너지지 않는 마음을 잡는데 제법이다


어렸을 때 외할머니가 사시던 초가집을 떠올렸을 때, 유달리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허름한 외형과 달리 단단해 보이던 주춧돌.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어느 작은 마을에 있는 어느 초가집의 주춧돌은 이상하리 만치 단단하고 굳건해 보였다. 태풍이 와도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그 7살 어린아이가 머리를 찧어 다섯 바늘인가를 꿰맸음에도 그 주춧돌이 여전히 밉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다. 어느 비가 많이 오던 여름날, 그럼에도 이 집이 안전하다고 느꼈던 데에는 그 주춧돌이 한몫을 했다. 마음껏 뛰어놀아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안정감에는 그 단단한 질감이 마음에 버티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아주 가끔, 비가 오는 날이면 가려운 이마의 흉터가 그리 기분 나쁘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마를 가로지른 상처가 생긴 이유도 나름대로 주춧돌이 제 몫을 했기 때문인 것 같다. 땅이 흔들리지 않을 것을 너무 믿어버린 나머지, 오히려 고꾸라져 단단한 것에 내 머리를 박았으니까.


운동에 대해 ‘지지 않는다-’고 표현하기엔 혹은 ‘위닝 스피릿’이라는 단어를 써먹기엔 뭔가 운동을 승/패를 가루는 용도로만 사용하는 것 같아 아쉬운 구석이 있었다. 연남동에서 시작해 DMC를 거쳐 고양시를 찍었다가 다시 돌아오는 15km 코스를 비롯해, 혈압으로 망가진 몸을 고치려 꾸준히 다니던 헬스장, 끝까지 책임지는 방식을 알려준 매 주의 꾸준히 했던 풋살과 이제 조금씩 시작하는 서핑까지 사실 남과 겨루는 스포츠보다는 자신과의 싸움이었던 적이 참 많았던 것 같다. 그러므로 ‘이긴다’라는 표현이 나에겐 썩 맞지 않는 표현이었다.


이기기 위해 운동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보다 우위에 있기 위해 운동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세운 목표, 자신이 세운 장소, 자신이 세운 힘을 꾸준히 그리고 끝까지 밀어붙여 어떤 것에 도달하고 싶었다. 책임지고 싶었다. 달성보다 도달, 성취보다 나아감, 성장보다 깊어짐 등을 하나씩 해보고 싶었다. 꾸준하고 싶었다. 어렸을 때부터 봤던 주춧돌을 마음 한편에도 만들고 싶었나 보다.


멈추지 않는 것


뛴다-는 건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나에게 뛴다는 건 멈추지 않는 것이다. 사실 나는 지구력이 강한 편은 아니다. 운동신경도 그리 좋은 편도 아니고, 운동을 배우는데도 서툴다. 이게 맞아? 싶을 정도로. 지금의 운동신경은 정말 후천적인 노력을 통해 간신히 평균치까지 끌어 올렸을 뿐.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가.


그럼에도, 잘하는 건 꾸준한 마음이었다. 처음 도보 여행을 했을 때 3일을 걸어 목적지에 도착한 것도 그 힘 때문이었던 것 같다. 마음을 다잡고 끝까지 의지를 가지고 나아가는 것. 이건 조금 했던 것 같다. 몸에도 마음에도 힘이 없던 시절, 힘을 내기 위해선 꾸준히 밀어 붙어야만 했었던 것 같다. 마치 러닝의 성질처럼 일주일에 두-세 번을 꾸준히 뛰었다. 무언가를 한다는 마음보단 멈추지 않게 끔 발자국을 움직였다.


하지만 당시 나는 스스로가 만만하지 않았다. 당시 내 혈압은 그리 좋지 않았다. 가끔은 길거리에서 쓰러질 정도로 좋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뛸 턱이 있나. 에너지가 있나. 쓰러지지만 않아도 다행이었다. 남들은 뛰기 시작하면 며칠 만에 페이스를 만들어 2-3km를 턱턱 뛰는데, 나는 3km를 넘는데만 시간이 꽤 걸렸던 것 같다.


그렇게 3주쯤 되었을 땐가. 뛰는 게 무엇인가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거기엔 인정이란 중요한 키워드가 있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뛰는 걸까. 남들에게 자랑할만한 성적일까. 부끄럽지 않은 달리기 실력 일까. 그것도 아니면 무엇일까. 하루정도인가. 그 고민을 잠깐 했던 기억이 난다.


돌이켜보면 중요한 건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다시 뛰었던다는 점이다. 나는 다시 뛰었다. 러닝을 하러 나갈 때 신던 육군보급품하얀색 신발을 신고. 매일 턱끝까지 차오르는 순간까지. 또 하루, 다시 하루 또 뛰었다. 저번주와 이번주의 성적이 비슷해도 다시 뛰었다. 더 오래 그리고 더 멀리 뛰었다. 그렇게 15km까지 거리를 늘렸다.


나는 무엇을 이긴 것일까. 무엇을 성취한 것일까. 이기고 성취했다기보단 버티고 지켰던 것 같다. 내 습관과 내 자리에서 나의 페이스를 지켰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 하고자 하는 의지를 지켰다. 당시의 우울이나 불안을 이겨내려고 했을까? 물론 그랬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나의 몸을 회복하는 것. 건강이라는 본질을 회복하는 것. 나와 내 의지를 지키고, 또 지켜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당시의 부질없음과 당시의  답답함, 누군가와 싸워 자신을 지킬 수 있던 힘, 공부할 수 있던 힘, 부딪힐 힘은 그 꾸준함에서 나왔다. 자신은 꾸준할 수 있다는 어떤 믿음.


절망에는 유통기한이 없다.


절망에는 유통기한이 없다. 그것은 누군가 소화해야만 사라진다. 특히 자신에게 두어진 희뿌연 답답함은 자신이 온전히 소화시켜 터뜨리든, 볶아내든 해야만 한다. 그리고 거기엔 필히 에너지가 필요하다. 정신적, 감정적 , 육체적 에너지가. 그리고 그 에너지는 움직여야만 나온다.(적어도 나는 그랬다.)


순간 심박수가 170까지 치솓았던 몸은 버틸만했다. 문제는 그다음, 그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다시 현실을 살아가야 한다는, 밖이 보이지 않는 어떤 답답함이었다. 얼마나 힘이 없었으면 하루에 5시간만 깨어 있어도 피곤이 스며들던 시절. 나에게는 정말 당연하게도 ‘이 체력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하는 느슨한 무기력이 나에게 스미고 있었다.


무기력에 대한 반응은 의지적으로 헬스장에 가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는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여 움직였던 건 아니었다. 낮이 되면 눈이 저절로 떠지듯, ‘이 정도 체력이라면 그리고 무기력이라면 움직여야 한다’며 없던 돈조차 끌어 모아 헬스장을 등록했다. 오전에는 헬스장을 다녀오고 오후에는 취준을 하는 스케줄을 그렇게 6개월을 소화했다. 걸어서 15분이 걸리던 헬스장은 무조건 주 4회 이상을 갔다.


지금 돌아보면 인정이 주지 않는 안정감이 있었다. 인정이 목적이 되면 ‘좋음’의 지속성은 떨어지는 것만 같다. ‘오운완’과 같이 남들에게 자랑하지 않았다. 자랑할만한 실력이 안되기도 했지만 누군가와 함께 하거나,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친구들과 관련 대화는 무조건 ‘배움’의 행태를 띄었다. 꽤 많은 도움을 받았다.


매주 4시간. 매일 1시간 이상. 단 한 주도 거르지 않고 반복하여 집과 헬스장을 왕복했다. 정말 싫었다. 초고추장 없는 브로콜리를 매일 먹는 느낌이었다. 즐겁지 않았다. 하지만 했다. 하는 게 중요했다. 힘을 빼고 꾸준하게.  굳이 말하자면 자신과의 싸움이었지만, 다르게 말하면 자신과의 화해이기도 했다. 자신과의 화해.


잔잔한 기쁨과 건강을 내 것으로 만드는 기분이기도 했고, 새로운 방식으로 내가 설립되는 기분도 들었다. 주춧돌의 모양이 달라지면 건물 입면이 주는 느낌이 달라지듯, 내 영혼의 입면 역시 조금씩, 그 태가 달라지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나를 어느 정도 믿을 수 있었다.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


사람마다 깊은 공감의 자리가 있다. 자주 축구(풋살)를 하는 친구와 그런 대화를 한 적이 있다. 친구는 나에게 말했다.

“나는 상대가 너무 강하면 일부러 부상당한 척을 해. 내 실력 때문이 아니라 부상 때문에 싸우지 못했다고 정신승리할 수 있으니까”

이 이야기는 나에게 꽤 깊었다. 그 마음이 너무 이해가 갔으므로.

그러나 나는 그 마음에 나 스스로 반문하는 것 같다. “스스로에 대해 책임져”라고.


축구하면서 참 많이도 졌다. 그리고 아마 많이 질 것이다. 나는 사실 그리 잘하는 편은 아니다. 또 그리 빨리 느는 편도 아니다. 세상에 축구를 잘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가. 어렸을 때부터 열심히 배운 사람은 얼마나 많은가. 능욕 아닌 능욕을 당할 때도 많았고, 치졸할 정도로 패배당할 때도 많았다.


사실 나는 승부에 크게 연연하진 않는 편이지만 그럼에도 압도적인 실력차이가 느껴질 때면 마음이 무뎌질 때가 많다. 나는 언제나 거기서 결정해야 한다. 내가 기분이 나쁘고, 떠나고 싶기도 하고, 최선을 다해 뛰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든다. 그냥 관전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싶을 때도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스스로에게 자문하는 것 같다. “스스로 가져갈 후회에 대해 책임질 수 있어?”라고.


내가 책임지고 싶은 건 다름이 아니다. 끝까지 안 하면 후회할 것 같다. 그 후회에 대해 나는 책임지려고 내 마음을 설득한다. 지더라도 후회 없이 지고, 이기더라도 후회 없이 이겨야 한다. 필드에서 나가면 분명, 분명히 후회가 남는 것 같다. 그 마음이 자꾸 나에게 차이고, 끝까지 걸린다.


자신의 몸의 주인이 된다는 것


자신의 방식대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 이를 주체성이라고 표현하는 것 같다. 나는 그간 주체성을 위해 내 취향을 기르고, 돈을 모으고, 능력을 뾰족하게 만들었다. 스스로 원하는 때 원하는 행동과 원하는 선택을 모두 할 순 없지만 현실적인 선에서 나는 선택할 수 있고, 스스로에게 부드럽게 사랑을 건넬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어느 정도 원하는 것을 만족스럽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신체의 반응에 대한 주체권은 없을 때도 많았다. 불안할 땐 심장이 크게 뛰었다. 급할 땐 몸이 먼저 나가거나 아니면 몸이 얼어붙었다. 내가 내 판단이나 내 생각대로 빠르게 대처한다기보다는 상황에 잡아먹혀 몸을 움직였다. 아, 차분할 땐 차분하고 기뻐야 할 땐 기뻐하고 슬퍼야 할 땐 슬퍼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불안하고 싶지 않을 땐 불안하지 않고, 적절히 스릴을 겪고 싶을 땐 겪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상황에 따라 심박수를 조절하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런 면에서 운동은 자신과 화해하는 일, 주도권을 나에게 가져오는 일 같기도 하다. 심박수가 높아져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일, 특정 근육이 아파도 다시 회복될 수 있음을 아는 일, 마음을 다스려 어느 상황에서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끝까지 하는 일. 지키는 일. 이는 어쩌면 마음을 지키는 일을 넘어 몸을 지키는 일 같기도 하다.


나는 운동 예찬론자는 아니다. 세상엔 운동 말고도 중요한 일들이 많다. 각자의 인생과 굴곡에 따라, 형질과 관심에 따라 각 사람마다 중요한 것이 다르다. 하지만 자신의 몸의 주인이 된다는 것. 그리고 어느 정도 됐다는 것. 이 감각은 내가 어렸을 때 본 주춧돌처럼 자신을 지켜주는 것 같다. ‘나는 나를 컨트롤할 수 있다’라는 가장 단단한 전제를 깔아주어 최소한 용기가 돼준다. 책임이 돼주고, 예측가능한 어떤 것이 돼준다. 그런 면에서 운동은 무너지지 않는 마음을 잡는데 제법이다. 아니 무너지지 않는 몸을 잡아주는데 제법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