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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몬 베유 Aug 15. 2024

도시인이 되고 싶지는 않았는데…

도시인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날씨이야기를 건네는 카페 사장님의 말투에는 환대가 서려있었다. 하이톤의 목소리, 두런두런 스몰토크 소리, ‘얼마 전까지 비가 안 왔어요-‘하는 자연스러운 대화의 흐름, 분명 두 사람은 처음 본 사이 같았다. 도시에서 저런 대화는 몇 날 며칠을 얼굴을 맞대어도 쉽지 않아 보였다. 물론 환대로 맞아준 손님은 내가 아니었다.


1년 만의 제주였다. 나는 1년 동안 강남 한복판-까지는 아니더라도 서울로 따지면 도시의 중심지에서 근무했다. 거주지도 옮겼다. 매일 논 밭의 향기 속에서 석양을 볼 수 있던 시흥 외곽에서, 성수와 건대를 익숙히 갈 수 있는 광진구로 사는 곳이 바뀌었다. 차가 다니고, 출퇴근길에 사람이 몰리고, 도시 소음이 끊기지 않았다. 그간의 갔던 여행 중 큰 여행은 베를린이었다. 역시 도시였다. 아- 돌이켜보면 나는 점점 도시에 물들었다.


제주에서 찍은 사진과 회사 앞 카페에서 찍은 사진.



내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카페 사장님의 약간 경계한듯한 표정이 떠오른다. 그분이 퉁명스럽다거나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도시인을 마주한 아주 약간의 경계심이 있는 표정. 그건 당연한 반응이었다. 반팔 와이셔츠에 버뮤다 바지를 입었으나 성수나 건대쯤 쉽게 볼 수 있던 패션은 일단 거리감을 만들어내기에 능숙했을 것이다. 이렇게 첫 번째 거리감이 생겼다. 그리고 두 번째. 커피를 추천해 주시려는 말을 건넸지만 나도 모르게 혼자 천천히 설명을 읽고 단독스럽게 커피를 골라 말했다. 최대한 나도 마음을 열어재끼려고 했으나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시켜 후다닥 회사로 올라가던 그 말투와 관습이 언어에 배어 나왔다. 그게 두 번째 벽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두 개의 벽이 생겼으나, 균열이 생겨 우르르 내려앉은 건 내 마음의 벽이었다.


어째선지 매 번 제주에 방문할 때마다 스몰토크가 가능하다는 건 내 약간의 자부심이기도 하였다. 이 스몰토크를 통해 친구를 사귀기도 하고, 재밌는 이야기들도 듣고, 제주 원주민과 이주민의 삶을 꼼꼼히 모으고 듣기도 하였다. 제주에서 한 달 살이를 두 번이나 하게 끔 한 동력, 제주에 내려올 때마다 나름대로 나를 환대해 준 사람들이 있던 이유, 제주를 40번 이상 오게 한 마음가짐의 시작도 바로 이 탓이었다. 현대자동차 영업사원으로 전 세계를 돌아다닌 아저씨부터 원주민에게 듣는 제주 40년 변천사 그리고 ‘제주는 나사가 하나 더 해진 사람들이 모인 곳이야’ 비유를 듣기까지, 그 수많은 말들이 내 안에 꾹꾹 눌러 담긴 이유는 아무래도 스몰토크가 가능했던 탓-일 수도 있었다. (물론 다른 다양한 이유들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 이야기들도 많은 이들이 언어와 표정 그리고 몸의 정직한 방향으로 수없이 환대해 주어 감사한 마음을 표하지만 지금은 뭔가 달라져있었다. 이전과 다르다-는 포인트가 계속 늘었다. 자유롭게 건네는 그들의 언어를 척하면 척 해석해내지 못했다. 우선, 이전 여행에서 후줄근하게 입어 상대방의 벽을 어느 정도 낮췄던 나는 사라졌다. 아- 카페에 있는 거울에 나를 비춰보니 영락없는 관광객의 모습이었다. 또 '커피를 마시는 것'이 중심이 아니라 여행과 대화 자체를 좋아했던 나는 없어졌다. 지출대비 맛있는 커피를 먹어야(만)했다. 아- 그래서 꽤 고민했다. 얼굴도 당연히 굳었다. 무엇이 됐든간, 여기서 치고 들어오는 다양한 경험들에 열려있던 나는 없었다. 딱딱하고, 유연하지 못한, 마치 넘실대는 파도에 가져다 놓아도 뻣뻣하게 굳어 혼자만 우뚝하게 서있는. 1년 전엔 파도에서 서핑까진 아니더라도 수영정도는 쳤던 것 같은데.


나는 이렇게 도시인이 되었다. 그렇다고 도시인이 되었나. 아니, 그건 또 아니다. 여전히 여유와 스몰토크가 좋다. 그럼에도 마음에 치고 들어오려는 스몰토크, 언어, 환대, 좀 더 열려있는 몸의 방향을 놓치지 않고 반응한다. 아직까지 이 모든 것을 ‘효율’로, ‘전략’으로 치환하지 않는다. 바쁨의 탄력을, 올곧이 개인에게 집중되는 삶의 습관을 당연하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조금 더 잘나고 똑똑해야 이 도시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신화와 진실사이 어딘가에 아직은 마음으로 저항한다.


그러므로 나는 경계인으로 남아있는 것 같다. 하긴 야 아직도 무식하게, 한시바삐 커피를 회사로 가져가면서도 종업원께 꼭 인사를 건네려고 한다. ‘오늘 커피가 잘 내려졌어요’하는 말에 아직까지 감동을 받으려고 하는 편이다. 경비아저씨에게 인사를 꼭 하려고 노력한다. 이건 내가 잘나서나 시간이 남아서가 아니다. 또한 효율과 전략의 영역은 더더욱 아니다. 내가 잘나서 건네는 자비와 같은 인사는 더더욱 아니고. 이건 그저 사람과 사람 간의, 어떤 공간과 공간의, 존중을 측정할 수 있는 사이 값이라고 믿는 편이다.


당연히도 내가 말한 특성이 도심지에 사는 사람의, 서울에 사는 사람의 특성을 설명하지 않는다. 반대로 이 특성을 가지지 않았다고 해서 마을 사람이라는 건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란 건 무엇일까. 고민하게 된다. ‘도심지 사람’이라는 단어에서, ‘서울 사람’이라는 단어에서, ‘마을 사람’이라는 단어에서 앞 접미사를 빼면 남는 사람. 사람이란 건 무엇일까. 나에게 한 가지 남는 건 긴장하지 않는 가볍고도 편안한 관계가 우리를 더 편안하게 한다는 점이다. 경계를 허무는 곳에 어느 정도의 자유가 서려 있다고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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