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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여름 May 28. 2024

8. 내가 워라밸로 증명하고 싶었던 것

가짜 여유


한국에 살 때 하루는 연트럴파크 공원에 남자친구랑 누워있었다. 저 멀리서 걸어오는 어떤 여자가 얼굴을 찌푸리고 우리를 보며 혀를 쯧쯧 차는 듯이 느껴졌다. 두 개의 보도 사이에 낀 좁은 형태의 잔디에 누워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잔디밭 바로 옆으로 지나가는 여자의 얼굴이 곧 가까이 보일터였다. 째려봐 주려고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어?" "엥?" 각자 친구의 얼굴을 발견한 그녀와 나는 어리둥절하게 서로 쳐다보다 폭소를 터뜨렸다. "아니, 팔자좋게 어느 외국인이 이렇게 또 부끄러움도 없이 서울 한복판에 대자로 뻗어서 누워있나 했더니 너였어?" 그렇다. 나는 서울 여기저기에 무척 많이 누워있었다. 어떤 날은 회사 옥상정원 화단의 좁은 대리석 벤치 위에 누워있던 적도 있고, 더 보수적인 회사를 다닐때는 멀리까지 산책을 나가서 아파트단지 벤치에 누워 해를 쬔 적도 있다.






아무데나 잘 누워있는 편입니다








내가 평소에 견디는 것들의 스트레스를 누그러뜨리려면 매일 매일 그 정도의 '췰함'이 절박하게 필요했다. 누군가 봤으면 맘 편히 놀러다니는 20대 여성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일정부분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놀지 않으면 내가 방향도 모르고 위태위태 걷고 있다는 것을 남에게 혹은 나에게 들킬까 두려웠다. 나는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지도 않았고, 나중에 외국으로 간다고 하지만 그것도 손에 꼽히지 않을 만큼 먼 햇수가 지나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 새에 내 마음이 변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나는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은 이뤄내본 적이 없었다. 유일하게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은 책과 글이었지만, 박봉과 무거운 업무강도, 미래의 성장 가능성을 생각해봤을 때 내 미래를 그 곳에 투신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 삶의 많은 부분들이 분절되어 있었고 그것이 외로움을 필히 불러일으켰다. 내 마음과 연결되지 않은 일을 할 때는 일분이 영원같았고, 마음을 나눌 수 없는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 있을 때는 오피스 칸막이 옆자리도 머나먼 섬 같았다. 


 


여행을 열심히 다녔다. 나 아닌 사람들은 모두 각자 원하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유럽여행을 다니며 가장 부러웠던 것은 오렌지색 불빛이었다. 창가 안에 켜진 따뜻한 오렌지색 불빛. 그 색깔의 불을 켤 줄 아는 사람들은 자기 인생에 따뜻함을 스스로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독일에서 여행하다 나는 재즈클럽에 들어갔다. 어둠침침하고 좁은 내부에 습도높고 고조된 분위기가 느껴졌다. 테이블마다 초가 켜져 있었고, 다닥 다닥 붙어있는 작은 테이블마다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벽에도 사람들이 빼곡했다. 불빛에서 반사된 너울거리는 빛이 사람들의 얼굴에 기대로 일렁거렸다. 콘트라베이스의 묵직한 음악과 열정적인 피아노가 바를 가득 채웠다.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의 웃음도 그 사람들을 보고 있는 관객석의 사람들도 이 분위기에 취해있었다. 나는 그렇지 못했다. 나는 그들의 바깥에, 내 마음 속 섬에 있었다.



브루클린을 여행하고 있었다. 가족은 한국으로 일찍 돌아가고 나만 며칠 더 여기서 보내기로 한 참이었다. 많이 걸어다닌터라 다리가 피곤해서 강가에 앉아 있었는데, 곧 저녁이라 브루클린 브리지 너머로 서서히 해가 지고 있었다. 강 어둑에 친구 서넛이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누가 웃긴 농담을 하는지 석양 따라 잔잔한 웃음소리가 퍼져왔다. 서울에 두고 온 친구들이 그리웠다. 전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이라는 도시에 있어도, 내 마음이 그곳에 없으면 나는 그곳에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베를린에도 브루클린에도 있지 않았다. 서울에 있을 때도 나는 서울에 있지 않았다. 나는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나는 어디에 있었을까?








운동을 열심히 했다. 클라이밍 짐에 일주일에 다섯번을 다녔고, 어느 순간부터는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고, 한강을 따라 조깅을 시작했다. 데이트를 열심히 했다. 틴더로 전세계에서 온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술을 자주 마셨다. 매번 식사때마다 어울리는 반주를 마셨다. 산골에서 장인이 혼자 만들어 유통이 안된다는 특이한 막걸리, 수녀님들이 빚었다는 와인, 요즘 가성비 좋다는 칠레 와인을 찾아 마셨다. 맛있는 음식을 열심히 찾았다. 티비에 나온 무슨 쉐프가 새로 열었다는 맛집, 새로 뜨고 있는 힙한 동네 구석에 숨어있는 곳들, 조금 특별하고 맛있는 곳이라면 모두 찾아다녔다. 이 모든게 다 의미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기쁨이 잘려나간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린 시절의 시간은 생존에 가까웠고, 사는 것과는 멀었다. 내 삶에 의미가 있으려면 그 때 갖지 못한 행복을 지금이라도 느껴야 했다.





테이블이 낮다 못해 없어진 힙한 카페 참 많이도 다녔다







일을 열심히 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일이 정체성과 동일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매일 적어도 8시간을 붙들고 있어야 되는 일이 자기자신의 삶 혹은 마음과 그렇게까지 떨어질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일에 마음을 붙일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내가 대학에서 공부했던 것, 평생 관심있어왔던 것과 전혀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나쁜 직업은 아니었다. 그냥 나의 과거의 전혀 연결되지 않은 채 단절된 곳에 내가 있었던 것 뿐이다. 사람은 선이고, 면이다. 태엽이 아니다. 여기서 잘 기능한다고 해서 쇽 뽑아다가 다른 비슷한곳에 넣어둔다고 자동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사람은 내면으로 움직이는 존재다. 나는 안쪽에서 잘려있었다. 



방향을 모르고 나를 채워왔던 것들도 나를 힐링할 수는 있는 것 같다. 지난 시간이 필요없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잃어버린 기쁨을 찾는 시간은 꼭 필요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시기가 온 것 같다. 언젠가는 나의 내면을 외면과 연결해야 되는 때가 온다. 내면이 소리치는 것을 계속 외면하는 것은 나에게 하는 거짓말이다. 기쁨이 돈을 주고 사는 찰나의 만족이 아니라, 나의 과거에서 이어진 만족, 속에서부터 이어진 의미, 인생에서 이루고 싶은 것에서 이어진 것이었으면 한다. 내가 하고 싶은 것, 관심있어 하는 것, 세상에서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나의 일, 나의 인간관계, 나의 취미, 이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잘 정렬되어 있고, 내 삶의 많은 부분들이 나에게서 단절되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이거짓말 하지않고 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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