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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여름 May 31. 2024

9. 나는 이걸 왜 하고 있는 걸까?

심리상담이 나에게 준 것

주1회로 상담을, 총 1년간 받았으니까, 1년은 52주 즉 적어도 52번은 상담을 받았다. 52번의 깊고 본질적인 대화는 나를 천천히 하지만 완전히 변화시켰다. 롤러코스터 같은 1년이었어서, 느낌상으로는 상담사와 나는 체감상은 훨씬 더 긴 길을 걸어온 것 같다. ‘제가 좋고 나쁨을 많이 가르는군요. 그러지 말아야겠어요’ 하다가 바로 다음에 ‘하지만 그건 좋은 선택이 아니잖아요’ 하며 아차 한다던가, 사람은 그대로 받아들여지는게 중요하다는걸 깨달았다가 다음날 애인에겐 ‘그렇게 생각하면 안되지’ 라고 소리친다던가. 아주 뒤죽박죽, 서너명의 마음 두더지들이 통합되지 못하고 이랬다가 저랬다가 불쑥 불쑥 튀어올랐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하나의 내가 그 시간을 산 것이 아니라 분리된 여러명의 마음들이 같은 시간을 병행해서 살아온 것 같다. 언젠가는 가족여행을 가서 울면서 긴급 상담을 신청한 적도 있다. 가족은 나에게 아무리 친밀한 사람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연결되지 못한다는 오래된 고통을 일깨운다. 나는 내 말을 있는 그대로 들어주고 내가 힘든데엔 그럴 이유가 있다고, 내편에서 믿어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상담사도 나랑 같이 울었는데, 그걸 보며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도 남의 고통을 보고 잘 울면서, 나의 고통을 알아주는 사람을 보면 아직도 의아하다.



책을 필요로 하는건 내가 극도로 힘들때마다 다시 불러들이는 습관이라, 작년 한해동안 상담을 받으며 어린시절과 트라우마에 관련한 심리학과 의학 책을 많이 읽었다. 나에게 책이란 나의 현재를 과거로 만드는 힘이 있는 요물이다. 지식은 나를 나아가게 만든다. 반복되는 과거의 현재의 고통에 갇혀 빠져나갈 길이 없다고 느껴질 때, 책은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어’라고 내가 몰랐던 세계로 나를 불러서 데려간다. 그러면 나는 출구없는 고통에서 빠져나와 미래로 간다. 나는 오랜 시간동안 마음을 억압하고 뇌로만 살았지만, 다리가 없는 사람은 팔로 걷는 방법을 배운다. 그래서 나의 뇌는 나를 감정 없이도 나를 좋은 곳으로 데려가는 법을, 고통에서 빼내주는 법을 잘 익혀왔다. 나는 오랫동안 감정을 그냥 느끼는 대신 어떻게든 머리로 이해하려고 했던 나의 오래된 습관인 감정의 주지화를 잘 알고 있지만 이것도 나의 일부라고 받아들인다. 나의 ‘머리’는 여태까지 나를 잘 돌봐주었고, ‘마음’이 새로 등장한 이 시점에도 나를 버리지 않고 익숙하게 나를 돌본다. 걘 내가 좋아하는 걸 알고, 내가 무엇을 하면 안심하는 지를 안다. 나의 모든 부분들이 나를 좋은 곳으로 데려가려고 노력하고 있고, 나는 그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



지식이 쌓이는 와중 삶을 살아나가며, 내 뇌와 몸이 책에서 배운대로 반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신기했다. 나는 어쩌면 이렇게 내 몸과 마음을 몰랐을까 싶었다. 나보다 의사와 심리학자들이 내 마음속을 더 잘 알았다. 어느 날 상담을 하면서 어느 순간 나에게 '감정'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그 때의 환희란 마치 헬렌 켈러가 물을 발견한 것과 같았다.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감정은 물과 같아서 무슨 일이 일어나면 반응이 생겼다. 돌부리를 만나면 솟아오르거나, 구덩이가 생기면 푹하고 가라앉았다. 매일 똑같기만 하던 매일매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버스가 늦게 오면 살짝 초조해지거나, 귀여운 새를 봤을 때 귀엽다 행복하다고 느끼거나 하는 일들이 생기며, 모든 일들에 감정이 반응이 있는 걸 알게되니까 너무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마치 감정을 방영하는 공짜 티비채널이 쭉 꺼져 있다가 이제서야 켜진 느낌이었다.



감정은 언제나 거기에 있었다. 다만 내가 이름을 불러주거나, 거기 있는 걸 고마워하지 않았을 뿐이다. 감정은 거추장스럽고 귀찮은 것,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좋음'과 '나쁨'을 라벨링하는 경향이 있는데, 감정에도 그를 발휘해 좋은 감정은 최대한 느끼고 나쁜 감정은 대충 어두운 자루에 넣어서 옷장 맨 뒤에 쑤셔박아놓았다. 슬픈 감정이 들면 다른 생각을 하려고 노력하며 조깅을 하러 나갔다. 해를 맞고 땀을 내고 돌아오면 기분이 그런대로 나아지곤 했다. 집에와선 침대에 누워서 트위터를 잔뜩 보거나 책을 읽었다. 그런데 어느순간 그걸로는 안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공부하다보니, 감정에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나니까 나쁜 감정들이 좀 불쌍했다. 걔도 그러고 싶어서 그렇게 처져있는 것도 아닌데, 마음속 옷장에 처박아둔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계속 처박아둔 감정들이 옷장에 박혀있지 못할 만큼 커졌구나 그래서 이제 막 터져나오는구나 싶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오래된 중독인 담배와 깊게 연관이 되어 있다는 사실도 배웠다. 슬프고 격정적인 마음을 혼자 소화할 수가 없어서, 나는 담배를 피워야만 했거든. 너무 기쁠 때에도, 너무 슬플 때에도.



나는 감정이 무척 좋았다. 감정이 있다는 걸 알지 못했을 때의 나는 반쪽짜리 인간 같았다. 사랑에 힘들어 몸부림치는 사람을 보면 무섭다고 생각했고, 고통을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은 약한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는 세상이나 사람들의 인생이 완전히 이해되지 않았고 나의 고통마저도 이해되지 않았다. 뭔진 모르지만 내가 뭔가를 놓쳤고, 반쪽짜리 삶을 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감정이 있다는 걸 몰랐을 때 내 삶의 지도에는 의무라는 단 한가지 방향만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해야 할 일을 항상 잘 알고 있었다. 그 방향은 항상 오른쪽이었다. 나는 왼쪽으로도 조금 가보고 싶고, 여기서 좀 뭉그적 거리고도 싶은데… 라고 내 마음속 보호자를 올려다봤지만, 안돼! 오른쪽으로 가! 그게 맞아! 안전해! 라는 말에 묻혀 네… 하고 얌전하게, 하지만 속에서 점점 커지는 혼란과 분노를 안고 계속 살아왔었다. 나는 감정이 너무 좋다. 이제는 뭔가 선택해야 될 일이 생기면, 운동장 구석에서 끄적거리고 있는 작은 아이에게 가서 물어본다. 안녕, 나 이런 문제가 있는데, 넌 어떻게 하고 싶어? 그러면 그 애가 음 바보같다는 건 아는데, 나는 이렇게 해보고 싶어 라고 아주 조그만 목소리로 말한다. 그러면 나는 아니, 하나도 바보같지 않아. 우리 그렇게 하자. 내가 그 길로 널 데려가고 또 보호해줄게 라고 짐짓 신나고 씩씩한 체 하며 손을 붙잡고 같이 걸어나간다. 그렇게 사는게 훨씬 재미있다. 



감정을 찾은지 6개월쯤 되었을까? 또 새로운 발견이 생겼다. 이제 나에게 신체 내부에 '감각'이라는 게 있구나 하는 깨달음이 든다. 아마 이것도 나의 삶에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했던지 많이 틀어막아두었던 모양이다. 신체 감각이라는 건 언제나 존재했지만, 감정과 연결되는 감각이라는 게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 아마 아이 때 고통스러움을 느끼는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루함을 느끼든 말든, 고통을 느끼든 말든 이 느낌을 가지는 건 별로 소용이 없었다. 의무만이 가득한 학교와 가족의 삶 속에서 해야되는 일은 무조건 해야하니까. 감각은 없는 편이 편했다. 내가 감각을 말해봤자, 그러지 말라는 말만 들을 뿐이었다. “아이고 이만한 일에 울어서 앞으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헤치고 나가려 그러니. 울지마라.” 어렸을 때부터 이런 말을 계속 들으면, 감각을 원천부터 차단할 수 있다. 놀랍게도 가능하다. 인간의 뇌는 정말 무한한 힘을 가지고 있다. 물론, 영원히, 완벽히는 속일 수 없지만. 어른이 되고 충분히 혼자 안전한 곳에서 책을 읽으며, 나는 나에게 다정해져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것만큼만 감당한다는 생각이 바탕이 되고나니, 언제나 가장 최선의 선택을 내려 고통스러워도 무조건 밀고 나가는게 아니라, 지금 내 마음을 따라 선택을 내리고 또 너무 고통스러우면 멈춰도 된다는 생각을 하고 나니, 비로소 감각을 느끼는 것이 안전하다고 깨달은 것 같다. 다시 감각을 느끼기 시작하니까 또 너무 재미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리고나서 추위가 인식됐다는 것이다. 항상 겨울에 춥게 입고 다녀서 가만히 있다가 감기가 걸리거나 갑자기 덜덜 떠는 일이 잦곤 헀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 과거에 내가 추웠던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입은 만큼만 따라 입고서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것만큼 추워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인것 같다. 그러나 나는 잘, 빨리 추워하는 편이다. 추위나 더위를 인식하면 제일 처음 드는 생각은 참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왜? 알수없다. 기억나는건 어렸을 때 집이 항상 좀 추웠고, 집에 따뜻한 물이 잘 안 나왔던 것 같다. (지금도 부모님댁에는 따뜻한 물이 잘 안나온다) 그리고 아마 어른들을 귀찮게 하지 않는 것이 습관된 아이였던 모양이다. 실제로 추위와 더위를 인식하기 시작하니까, 내가 생각보다 훨씬 빨리 추워진다는 걸 깨달았다. 다른 사람들보다 좀 예민한 아이였던 것 같다. 그걸 이것저것 요구하면 다른 사람에게 폐가 된다고 생각해서 감각을 무시하거나 감정을 무시하거나 혼자 어떻게든 해보려는 아이로 자랐던 것 같다.



감각을 인지하기 전에는 겨울은 나쁜 계절, 가을은 슬픈 계절, 여름은 좋은 계절, 봄은 희망의 계절이었다. 항상 삶은 힘듦으로 가득차 있었고, 계절은 그걸 헤쳐나가는데 도움을 주거나 혹은 더 나쁘게 만들거나 하는 효과 밖에 없었다. 나의 모든 인생 자체가 이 애매한 '좋음'을 위한 무조건적 해바라기를 하고 있어서, 인생의 모든 요소들이 그 목적에 부합하면 좋고, 아니면 나쁘다고 라벨링되었다. 여름은 밖에 나가서 친구들과 떠들고 놀면 힘든걸 잠깐 잊을 수 있으니까 좋은 계절이었고, 겨울은 나를 더 춥고 쪼그라들고 우울하게 만드니 나쁜 계절이었다. 지금은, 아주 작은 추위라도 허락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겨울이 그렇게 괴롭지 않고, 겨울이 가져다주는 차분함이 고맙기도 하다. 겨울이 무섭지 않으니까 가을도 그렇게까지 슬프지 않고, 여름은 너무 더울 때는 힘들기도 하구나 라는 당연한 깨달음도 생겼다. 봄은 계속해서 좋다. 나는 희망이 좋으니까.  



이렇게까지 먼 길을 와서 다시 소파에 누워본다. 어제는 하루종일 소파에 누워있었는데, 1년전의 나와 비교하면 똑같은 것을 했더라도 여러가지가 바뀌었다. 우선, 이제 죄책감이 없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렇게 하루종일 누워있을 것을 미리 '계획'까지 했다. 예전의 나라면 게으른 활동은 절대 계획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누워있는 동안 나의 몸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관찰했다. 두세시간에 한번씩 불안이 아랫배로 몰려오는게 느껴진다. 다리가 전반적으로 뻣뻣하게 굳는다. 심호흡을 하고 괜찮다고 생각하면 슉 사라진다. 그랬다가 심호흡을 멈추면 다시 돌아온다. 왜 불안하지? 하고 생각해본다. 트라우마에 관한 책을 읽고 있는데 그게 스트레스를 주는 모양이다. 이런 책이 스트레스를 주는지도 원래는 몰랐다. 불안에 효과가 있는 약을 아침에 걸렀던 생각이 나서 약을 먹고 다시 누웠다. 이제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냥 담배를 피운다. 언젠가 끊어야 될 것을 알지만, 예전에 내가 불안했을 때 이것이 있어서 그 시절을 겪어나왔다는 생각이 드니 조금 고맙기도 하다. 나중에 더 정신적으로 안정적인 상황이 될 때 나는 끊을 수 있을 것임을 알기에 지금은 스트레스받지 않기로 한다. 할 수 있을 만큼만 한다. 그렇게 생각해도 이미 너무 많이, 열심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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