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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여름 Jun 04. 2024

[사랑에 관한 에세이] 6 - 피플 플리저의 사랑

대화가 시작되는 순간

사랑이라고 부르거나 도파민 하이라고 부르는 열정에 가득 찬 미친 시기가 지나고 나면, 조금 어색한 순간이 찾아온다. 깨어나는 순간. 마치 우연히 어떤 럭키한 밤에 술을 진탕 먹고 나서 처음 만난 사람과 순간만이 존재하는 밤에, 인생은 너무 멋져 어깨에 어깨를 걸고 별빛이 내리쬐는 골목을 함께 영원히 걷다가 다음날 술기운이 깨고 나면, 아, 너무 민망해지는 순간. 내가 어제 또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한 건 아닐까(물론 했다) 실행할 수 없는 계획을 세운건 아닐까 (물론 세웠다) 그런 느낌이 숙취와 함께 불안감이라는 이름으로 스멀스멀 몰려드는 것이다.

이런 느낌처럼 사랑에서 깨어나는 순간은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밥을 먹다가 (얘는 밥을 왜 이렇게 쩝쩝대면서 먹지) 아침에 일어났는데 (얘 입냄새가 원래 이렇게 심했나) 과장되게 뭔가 이야기 하는 모습을 보다가 (아 정말 왜 저렇게 오버하지) 와 버린다. 조금 곤란하고, 때론 머쓱하다. 사랑이 깨어나고 나면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나는 대체로 그런 순간이 오면 음 이건 무슨일이지? 하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그 곤란한 마음을 씻어내보려고 한다. 이건 오늘만 일어나는 일일거야 라고 잠깐 부정해보는 시간을 가진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가게 두며 좋은 시간을 다시 만들어보려 한다. 야속하게도 그 순간은 다시 온다. 당신의 파트너가 뭔가 바보같은 짓을 하는 순간이. 비트코인 대해 멈추지 않고 떠들어대는 순간이라던가, 다친 무릎을 치료하러 의사에게 가는 것을 세달째 미룬다던가 하는 순간은 오기 마련이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잠깐 앉아 생각을 한다. 날카로운 제정신이 돌아와 경고 신호를 보낸다. ‘이 사람은 너가 생각했던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 ‘이 사람에과 과연 너의 남은 평생을 바칠수 있어?’ 라는 생각이 불쑥 불쑥 공격하듯 솟아오른다. 거기다가 ‘역시 남자를 믿으면 안되지’ ‘결혼하는건 무조건 여자가 지는 거래야’라는 오래된 미용실 에서 들었던 것 같은 남편 혹은 가부장제에 이골이 난 이모님들의 목소리도 저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다. 

비트코인 얘기 좀 그만...


이 불안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아무리 누군가가 나와 비슷하더라도 모든 사람은 나와 다른 개체이며, 우리는 같을 수 없다. 어떤 면은 너무나 비슷하더라도 다른 면들은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이 차이점과 이 낙차들이 나타났을 때, 우리는 나와 상대를 어떻게 잘 조절할 수 있을지 커뮤니케이션 해야 한다. 그런데 이게 나같은 ‘피플 플리저’ 들에게는 커뮤니케이션 혹은 조정이라는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피플 플리저라는건 타인의 만족과 승인을 얻기 위해 지나치게 노력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다른 사람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자신의 욕구를 뒤로 밀어놓는다. 당신이 정말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을 기쁘게 하며 살아온 유년시절을 보냈다면, 내 욕구가 무엇인지 알기조차 어려울 수 있다. 그냥 상대를 기쁘게 하는 것 외에 내가 원하는 건 없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연인과의 커뮤니케이션에서 피플 플리저들이 겪는 어려움은 이렇게 나타난다. 상대가 뭔가를 했다. 그런데 그게 나의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마뜩치 않게 느끼게 한다. 그러면 나는 생각을 해보고 이렇게 전달할 수 있다. ‘너가 어제 어떤 행동을 했는데, 너가 좋은 의도였다는 건 알지만, 난 그런게 좀 불편했어. 이거에 대해 얘기해볼래? 혹은 앞으로 그 행동을 좀 적게 해줄 수 있을까?’ 보통 사람들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피플 플리저들에게는 불가능에 가깝다. 저 말을 할 생각만 해도 스트레스가 치솟는다. 그래서 그만둔다. 어려운 점은 이거다. 첫째로, 내가 불편감을 겪은 것보다 남이 상처를 받을 것이 더욱 걱정된다. 남과 나 사이에 우선순위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피플 플리저는 ‘내’가 남 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믿지 않고, 세상은 무한히 객관적인 세계라고 생각하므로.

내 인생을 사는건 오직 나이기에 내 인생을 위해서는 ‘나’를 가장 우선순위에 두는 ‘주관적인’ 선택을 해야 하는데, ‘나’나 ‘남’이나 중요성에서 차이가 없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오면 그냥 얼어버리거나, 아무말도 하지 않는 선택을 한다. 아마 이전에 이런 대화를 할 때 상대가 충분히 성숙하지 않아서 과하게 상처를 받아버리거나, 당신에게 화를 내거나, 이런저런 불쾌한 상황이 발생했었을 것이다. 나의 엄마는 '애가 못됐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좋게 좋게 생각하라'고 자주 말하셨다. 그런데 이런 대화를 하지 않은채로 좀 시간이 지나가버리면, 이런 대화를 할 수 있는 능력도 근육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이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남에게 약간 안 좋은 말을 할 생각만해도 등에서 식은땀이 나고, 그것 자체로 스트레스고, 그러느니 그냥 내가 참고말지 하게 된다. 그러다 상대가가 나에게 약간의 불만을 전달하면, 이런 대화에 대한 내성이 전혀 없는 상태라 눈물이 불쑥 나서 엉엉 울어버리게 되기도 한다. 나는 이런 것까지 참았는데, 너는 이런 것도 못 참아? 그러면 이제 관계는 너무 많은 줄들이 꼬여버려 어디부터 서러움을 풀어야될지 모르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초반의 사랑은 이런저런 인간관계적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처음 본 사람인데 나에 대해 이정도는 모를 수 있지, 이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하는구나? 라고 몇 번 정도는 넘어갈 수 있다. 약간 열받는 말도, 좋아하니까 못들은 척 할 수 있다. 그러나 피플 플리징은 본질적으로 자기자신을 배반하는 행위다. 내가 아닌 뭔가인척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 의도가 선하든 아니든 간에 어떤 사람도 그러면서 영혼까지 행복할 수는 없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화가 생기고, 예측 불가능한 순간에 나도 모르게 서운함이 팍 하고 터져나온다. 피플 플리저의 세계엔 오해와 포기가 있다. 커뮤니케이션을 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해 전달하지 않는 쪽을 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오해들이 꽤 많이 쌓이기 시작하면, 그 때 그 관계를 그대로 놓을 것인지 아니면 고쳐 쓸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사랑에서 깨어나는 이 순간이, 사실은 대화를 진짜로 시작할 수 있는 시기일 수도 있다.

어디다 선 그어야 되나 정말 어렵다

둘의 회사가 가까운 곳에 있어서 점심시간마다 공원에서 만나 도시락을 나눠먹을 수 있거나, 영화나 음악 취향이 맞는 것 만으로도 재미를 쏙쏙 착즙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유효기간이 지나고, 이래저래 움푹 파인 흠들이 있는 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보게될 때 우리는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나 자신의 흠을 들어 계산기를 두드려보기도 하고, 이 사람의 따뜻한 마음에 미안함이나 죄책감을 느껴보기도 하고, 좋은 기억들을 돌이켜보며 이 기억이 앞으로도 계속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나? 스스로에게 자문을 해보기도 하면서.

 

이 관계를 앞으로 더 끌고갈까 아닐까 결정하게 하는 기준은 뭘까? 모두 다르겠지만 나는 솔직히 말해서 재미있으면 되는 것 같다. 각자 인생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에 같이 흥미를 느끼고 많이 떠들 수 있고 같이 뭔가 하면서 즐거울 때, 내가 안좋아하는 내 모습을 보여줘도 인정 받을 때, 내가 상대의 덜 멋있는 부분까지 귀엽다고 이해될 때, 한 팀으로 배를 운행하면서, 내 시프트를 끝내고 잠 자는 동안 상대의 운전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되면 혹은 그럴것인지 알아보고 싶으면, 진짜 대화를 시도해봐야만 한다. 만약 당신도 나처럼 피플 플리저라면, '나의 욕구'를 알아내는 법에 대한 팁을 공유하고 싶다. 당신이 '앗' 하는 순간, 그 때 당신이 빠르게 지워버리려고 하는 '에이 아닐거야' 그 전의 순간 가장 먼저 빠르게 들었던 생각이 당신의 진짜 욕구다. '아 불쾌한데', '저런 말 왜 하지', '으 왜 저래?' 이건 모두 지켜줄 만한 가치가 있는 우리의 진짜 마음이다. 이런 마음을 가진다고 당신이 나쁜 사람이거나 이기적인 사람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욕구를 가져도 된다. 이것을 가지고 또 알아야 남에게 알려줄 수 있고, 진짜 대화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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