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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겸비 Feb 20. 2024

딸을 둔 엄마가 아들 육아서를 읽는 이유


나는 두 딸의 엄마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첫째는 만 5세이고 둘째는 올해 4월 출산 예정이다. 딸이 둘이라고 이야기를 하면 대개는 호의적인 반응이다. 경상도 지역에서 90년생으로 태어나 '백말띠 여자는 드세다'는 말을 들으며 자란 나로서는, 새삼 시대가 바뀌었다는 느낌도 든다.






첫 아이의 이름을 지어줄 때 몇 가지 고려했던 조건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이름만 들었을 때 성별이 가늠되지 않는, 즉 중성적인 이름이었다. 왜냐하면, 그냥 내가 아쉬워서 그랬다. 나는 누가 들어도 '여자구나' 싶은 이름이기 때문이다. 아이의 이름에는 지어준 사람의 기대가 담기기 마련인데, 성별을 떠나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아이이길 바랐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생각지 못한 일이 생겼다. 일단 아이는 두 돌이 지날 때까지 머리가 묶이지 않을 정도로 머리숱이 적었다. 유모차를 끌고 나가면 동네 어르신들로부터 "아고~ 아들내미가 참 예쁘네."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거기에 이름까지 중성적이니, 아이의 머리숱이 별로 없던 시절에는 병원이나 문화센터 등에 데려가서 이름을 대면 당연히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금만 중성적인 스타일로 가도 '아들맘'이 되었던 시절


나는 초심을 잃고 자가당착에 빠졌다. 성별에 얽매이지 않고 그냥 아이답게 잘 키우겠노라 하던 결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보닛을 씌워 아이의 머리숱을 가리고 꽃무늬 치마를 입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는 레이스가 달린 치마나 보닛을 답답해하며 벗어버렸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렇게 엄마의 로망(?)을 부숴준 아이에게 오히려 고맙다.


숨겨진 여성성을 끌어내기 위한 엄마의 노력


첫 아이를 임신하고 성별을 알게 되었을 때, 딸 육아서 몇 권을 읽은 적이 있었다. 대체적으로 '딸은 감정의 결이 섬세하니, 이를 잘 이해해주어야 한다.'가 주된 내용이었다. 그런데 막상 낳고 보니 우리 아이는 오히려 아들 육아서가 맞는 기질이었다.


최근에는 최민준 아들연구소 대표가 쓴 <최민준의 아들코칭 백과>를 읽었는데, 구구절절 공감되는 지점이 많았다. 승부욕이 강하고, 활동적이고, 이성적이며, 이름을 불러도 좀처럼 대답이 없는 그대여!


예를 들어 우리 아이는 '자신의 감정을 이해해주지 않는 상황'보다는 '지금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는 상황'일 때 더욱 분노한다. 그래서 감정은 간결하게 읽어주되, 아이의 욕구에 대해 이건 된다, 안 된다 정확한 상황을 알려주고 대안 몇 가지를 제시해주는 방법이 더 효과적이었다. 한두 번 불러도 대답이 없을 때 가까이 다가가 눈을 보고 이야기해 주는 방법도 아들 육아서에서 배워서 아주 유용하게 써먹고 있다.


아이는 현재 다니는 기관에서도 여자아이들보다는 남자아이들과 더 잘 어울리고, 특별활동 중에 체육 시간을 제일 좋아한다. 단짝친구의 개념은 아직 없고, 우르르르 아이들을 몰고 다니는 골목대장 스타일이다.


남편이 보고 '공대 아름이'냐고 했던 사진


소위 '공주병'도 최근 몇 달에 시작되었으니, 또래에 비하면 상당히 늦게 왔다. 이전에는 치마도 불편하다고 안 입었었는데, 요즘은 '엘사'가 되어보겠다고 원피스를 입고 등원을 한다. 이런 아이의 변화가 그저 신기하다.






대학교 때 발달심리를 공부하면서 남성과 여성이 가지는 생물학적 경향에 대해서도 배웠다. 수업 시간에 EBS 다큐프라임을 시청했는데, 흥미로운 내용이 있었다. 전체 남성 또는 여성 중 일부는 다른 성별의 경향에 더 가까운 뇌를 타고난다는 것이었다. 즉 '남성적인 뇌를 가진 여성', '여성적인 뇌를 가진 남성'이 존재한다. 연구자들에 의하면 이러한 비율이 약 17% 정도라고 한다.



관련내용은 44:00부터



17%, 적다면 적지만 매우 드문 확률도 아니다. 그러니 성별만으로 그 아이의 특성을 모두 뭉뚱그려서 '아들(딸)이라서 그렇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만약에 우리 아이가 아들이었다면, 나는 그걸 성별의 영향이라고 그냥 단정 지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나는 이 '17%'의 존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사람은 성별만으로 정의할 수 없는 다양한 특성을 갖고 있다. 우리 아이만 하더라도 소위 남성스러운 면과 여성스러운 면이 공존한다. 승부욕이 있고, 이성적이고, 체육을 좋아한다. 동시에 간접화법을 꽤 잘 사용하며(예를 들어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으면 "덥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식이다), 아기인형을 돌보는 놀이도 좋아한다.


우리는 한 사람이 갖고 있는 다양한 특성의 집합을 성별, 사주팔자, 출생순위, 지역 등등 어느 하나의 요인으로 정의 내릴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은연중에 자녀에게 기대를 가진다. '딸답게' 사근사근하고 잘 챙겨주면 좋겠고, '아들답게' 듬직하고 패기가 넘치면 좋겠고... 성별, 출생순위, 발달 수준 등등에 따라 각각 바라는 점이 다르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가 아이들에게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 특히 아이가 타고난 특성이 기대와 다를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너무 쉽게 '쟤는 아들인데 저렇게 소심하지?', '쟤는 딸이면서 저렇게 왈가닥이지?'라고 생각하고, 가끔은 생각을 표정이나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 이야기하는 아니다. 바로 내가 그랬었다.


그래서 '존중'이 필요하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점을 '얘는 딸이라서 그래.', '팔자를 타고나서 그래.', '첫째라서 그래.' 이런 식의 말로 억지로 결론짓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농담으로라도 '남자답게', '여자아이답게', '아들(딸) 답게' 등 내가 가진 기대를 강요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렇고, 내가 현장에서 만나게 될 아이들에게도... 대신 아이들이 가진 고유함을 더 많이 발견하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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