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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겸비 Jan 28. 2024

비유하자면, 아이는 '나의 취향과 다른 선물'이었다

아이의 다섯 번째 생일에 부쳐


그럴 때가 있다. 엄청 고대했는데, 가끔 나의 취향이 아닌 선물을 받는 때 말이다.




1.
대학생 때, 친구가 중국 여행을 갔다가 재스민차를 선물로 주었다. 내가 생각나서 사 왔다고 했다. 부연설명을 하자면... 나는 학창 시절 잠이 너무 많아 "(또) 잤어?"라는 말을 많이 들었었고, 내 성과 합쳐져 별명이 '재스민'이 되어버린 슬픈 사연이 있다.

차를 굳이 찾아 마시지 않던 나였지만, 내가 생각나서 사 왔다는데 맛보지는 않을 수 없어 한 번 마셔봤다. 그런데 의외로 씁쓸한 차의 맛과 입을 감도는 은은한 꽃향이 일품이었다. 차를 홀짝이는 나를 보고 부모님이 놀라셨던 기억이 난다.


2.
첫 회사에서 퇴사하고 새 출발을 하던 날, 직장 상사에게 향수를 선물로 받았다. 앞으로의 삶에도 향기가 가득하길 바란다는 메시지와 함께였다. 나는 바닐라 향의 향수가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나는 향수에 조예가 없었고, 드러그스토어에 가서 가장 인기 있다는 제품들을 시향하고 마음에 드는 걸 하나 샀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선물로 인해 나는 향수의 세계가 무궁무진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갓 건조한 세탁물, 비 온 날 풀 냄새 향의 향수가 있다는 것도!




가끔은 나에 대해 깊은 고민 없이, 선물을 주는 사람의 취향만 반영된 선물을 받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대개는 자신의 취향 안에서 나를 생각하며 고른 선물들이 대부분이었다.

처음엔 좀 낯설지만 곧 그 선물을 탐구하면서 선물을 준 사람의 생각을 헤아려 보게 된다. 그리고 이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기도 한다.






그저께, 갑자기 아이가 열이 났다. 내일이 생일파티인데! 예상치 못한 가정보육으로 변동이 생긴 스케줄을 조율하며 머리를 복잡하게 굴리는 동안에도, 아이는 트니트니 율동 영상을 틀어놓고 격하게 뛰었다.


'말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가 그냥 두었다. 아프면 가만히 쉬어야 하는 나와 달리, 아이는 아픈 와중에도 에너지를 발산하지 않으면 오히려 처진다. 그러니까, 아이는 나름의 방법으로 회복 중인 셈이다.


나는 호기심이 많지만 겁은 더 많아서 실행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에너지가 빨리 소진된다. 하지만 아이는 매사에 거침이 없다. 열이 39도가 넘어도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심심해~" 돌림노래를 부른다. 좀처럼 지치는 기색이 없다.


선생님이 보내주신 사진은 절반이 흔들려 있다



내게 첫째 아이는 비유하자면 '내 취향과 다른 선물' 같다. 내가 선호하는 것, 내게 익숙한 것이 아닌 조합을 갖고 태어났다. A를 입력하면 Z가 튀어나온다. 시간이 흐를수록 견고해지던 나의 세계에 갑자기 뚝 떨어진 무언가이다.

그전까지는 나와 다른 것은 곧 이상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럴 수 있지.' 이해심이 넓은 듯 보이지만 '하지만 나는 그렇게 안 할 거야.'라는 고집도 강했다. 어쩌면 신께서 이런 나를 너무 잘 알아서 첫 번째로 이 아이를 '선물'하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아이를 보며 나는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 저렇게 말(행동)할 수 있는 거구나! 그래도 세상이 두쪽 나지 않는구나!" 처음에는 의아함에 가까웠지만, 지금은 진심으로 탄복해서 나오는 생각이다. 나라면 선택하지 않을 방향을 아이는 선택하고, 내게 익숙하지 않은 방법으로 아이는 멋지게 해낸다.






악뮤(AKMU)의 멤버 이찬혁이 만들고 이수현이 부른 노래 'ALIEN'의 가사에 이윤우 작가가 그림을 그린 <에일리언>이라는 그림책이 있다.





이 그림책은 시무룩해져서 귀가한 아이를 엄마가 꼭 안아주면서, 숨겨진 탄생의 비밀을 들려주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엄마는 내가 에일리언이라고 했어.

사실 넌 저 먼 별나라에서 왔단다.





'금메달까지 딴 일등 선수', '점점 잘나고 커진 널 더 이상 행성이 담을 수 없었지', '따뜻한 물에서 수영하는 걸 좋아했던 널' 등의 표현은 아이가 엄마의 뱃속에서 수정되어 양수 속에서 헤엄치다가 태어나는 과정에 대한 기발한 은유로 가득하다.


모든 아이는 반짝이는 특별함을 안고 태어난다. 이 특별함을 먼저 마주하는 사람은 바로 부모이다. 아이에게 '너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알려주는 것도 바로 부모이다. 아이에게는 자신이 가진 강력한 힘의 정체에 대해 해석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부모조차도 아이가 가진 것들을 '특별함'이 아니라 '유별남'이나 '약점'으로 여길 때가 있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느꼈으니까.


나만의 관점을 내려놓고 아이를 바라보면, 아이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큰 힘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난 오늘도 생뚱맞게 나의 행성에 떨어진, 뜻밖의 선물 같은 이 아이를 들여다본다. 이렇게 발견한 아이의 특별함을 꼭 안고 이야기해주겠다 다짐하면서...


내 세상을 넓혀준 선물, 사랑스러운 에일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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