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첫째 아이와 함께 잠을 잔다. 70여 일 된 둘째가 있지만 평일에는 친정어머니가 간밤에 데리고 주무셔서 누리는 호사(?)이다. 갓난아이 둘째에게 많은 걸 양보하는 첫째도 이 시간만큼은 엄마를 온전히 독차지한다.
5세가 된 아이는 언어가 더 깊고 넓어졌다. '수다를 떤다'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이다. 오늘은 어린이집에서 어떤 활동을 했고, 선생님이 어떤 걸 가르쳐주었으며, 누가 혼이 났는지 종알종알 이야기한다.
오늘도 같이 누워 방 천장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뜬금없이 아이가 이런 말을 했다.
"엄마, 나 ♡♡어린이집 친구들이 기억이 안 나."
♡♡어린이집은 아이가 3세부터 4세 중반까지 다녔던 곳이다. 이런저런 이슈 속에서 그나마 아이의 인생 중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던 어린이집이다.
이사하며 어린이집을 떠날 때, 나는 못내 아쉬웠지만 아이는 더 크고 새로운 어린이집을 갈 수 있다는 것에 더 들떠 있었었다. 그런데 그 어린이집을 떠난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오늘, 갑자기 그곳에 있었던 친구들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몇몇 아이들의 이름을 꼽았다. 아이가 "맞아~" 하면서 반가워했다. "나 땡땡이랑 땡땡이는 기억나! @@어린이집의 땡땡이랑 땡땡이도..." 막 종알거리더니, "엄마는 엄마 어린이집 친구 기억나요?" 묻는다. 30년 가까이 지난 기억을 곱씹으며 "글쎄.. 땡땡이랑... 땡땡이?"라고 말하자 "그렇구나."한다.
첫째는 외향적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참 '쿨한' 성향이다.첫째는 사정상 어린이집을 세 번 옮겼고, 그때마다 "새 어린이집 언제 가?"라는 질문을 몇 번이고 하던 아이였다. 새 어린이집으로 옮긴 뒤에도, 이전 어린이집의 선생님이나 친구들에 대한 언급을 먼저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아이의 그 말이 새삼스레 놀라웠던 것이다. 세상 쿨하게만 보였던 아이에게도 나무에 나이테가 겹치듯추억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그리움'과 비슷한 감정을느꼈나 보다. 그래서 함께 놀고 투닥거리며 지냈던, 하지만 지금은 흐릿해진 아이들의 이름이 문득 궁금해졌나 보다.
한동안 재미있게 봤던 드라마가 있었다. 남자주인공을 구하기 위해 여자주인공이 시간여행을 하며 미래를 바꾸려고 고군분투하는 내용이다. 이 드라마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선재 업고 튀어> 15화 중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여. 살면서 보고 듣고 느끼는 수만 가지 기억들이 다 어디로 가겄냐? 모두 내 이 영혼에 스미는 거여. 그래서 내 머리로는 잊어도 내 영혼은 잊지 않고 다 간직하고 있제.
나도 나이가 들면서 기억하지 못하는 얼굴과 이름이 많아진다. 가끔 그것이 아쉬울 때도 있었다. 어떠한 사건은 기억나지만, 그때 함께했었던 이들의 얼굴이나 이름이 흐릿하다. 잡히듯 잡히지 않아 아련하다. 그래서일까, 나는 아이와의 대화에서 뜻밖에 위로를 받았다.
5년 남짓 산 아이에게도, 35년을 산 나에게도 시간의 망각은 공평하다. 하지만 비록 모든 기억이 선명하지는 않더라도, 그 과정에서 느낀 모든 것은 '나'를 구성하는 데 기여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내가 이런저런 감상에 젖어 있는데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린다. 아이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나도 가만히 누워 '내 머리는 잊었으나 영혼은 잊지 않았을' 이들의 이름과 얼굴을 생각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