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게재, <바이올린 플레이어> 영화평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상황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본 일이 있다. 떠오른 것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걷지 못하게 된 발레리나, 웃기지 못하는 코미디언, 손가락이 잘린 피아니스트, 목소리를 잃은 가수 등등.
누구보다 간절히 꿈꿨을 이들이기에, 그 꿈이 완전히 꺾였을 때의 고통도 클 것이라 생각했다.
한국에선 다소 생소한 핀란드 영화 <바이올린 플레이어>의 주인공 카린(마틀리나 쿠스니엠미 분)도 그런 사람이다. 어려서 명성을 얻은 바이올리니스트로, 어느덧 40대가 됐지만 수년 동안 스케줄이 가득 차 있을 만큼 세계적인 연주자의 자리를 공고히 하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 재앙이 닥친다. 자신을 향해 달려든 자동차에 치인 것이다. 그 사고로 카린은 손의 감각을 잃어버린다. 악착같은 노력으로 바이올린을 들어보지만 그녀의 활은 전처럼 날렵하지 않다. 수백 년 된 스트라디바리우스에선 꽥-꽥- 하고 듣기 힘든 소리만 날 뿐이다.
연주가 전부였던 음악가가 손을 잃었을 때
카린은 신경손상으로 재활이 불가능하다는 의사들의 소견을 믿지 않는다. 악착같이 매달리고 또 매달린다. 무너진 터널 속 한 줄기 빛도 들지 않는 가운데 카린은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딛는다.
"사고를 당하고 모든 걸 잃은 건 당신만이 아냐."
카린의 남편, 야코(새무리 에델만 분)가 말한다. 벌써 몇 달 째 희망 없는 재활에 매달리는 카린을 보며 야코는 괴로워하다. 카린이 거듭 실패하고 절망하는 모습을 보며 기다리고 또 기다리지만 변화는 없다. 전부였던 음악을 잃은 카린에게 남편과 자식은 중요치 않은 존재가 되어버린 듯하다.
영화는 카린의 절망으로부터 시작한다. 교통사고로 더는 연주를 할 수 없게 된 카린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야코는 연주자가 아닌 삶에 적응하라고 권하지만, 연주자 아닌 삶이란 카린에겐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겨우 음악선생이나 하라니. 카린은 받아들일 수 없다. 최고의 음악가들이 제 기량을 뽐내는 세계에서만 살아온 카린에게 핀란드의 음악학교는 좁아도 너무 좁다.
날개 꺾인 선생과 미성숙한 제자의 위험한 관계
카린은 연주를 할 수 없다면 지휘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지만, 전 세계를 둘러봐도 몇 안 되는 자리가 이제 막 발을 떼려는 그녀에게 돌아올 리 없다. 조급하고 현실에 불만족하는 카린은 자꾸만 스스로의 삶을 파먹는다.
그런 카린에게 한 사람이 다가온다. 그녀가 가르치는 학생 앙티(올라비 우시비르타 분)다. 애인과 캠퍼스 커플로 지내는 앙티는 저를 가르치는 카린에게 왠지 모를 끌림을 느낀다. 동경하던 천재 바이올리니스트가 날개를 꺾인 채 저를 가르치고 있으니 관심이 갈 수밖에 없다.
영화는 카린과 앙티의 위험한 관계를 실제 있을 법한 현실적 사건 가운데 그려낸다. 카린은 제가 아는 인맥으로 앙티의 성장을 도우려 하고, 앙티는 그런 카린의 기대에 부응하려 노력을 경주한다. 선생과 제자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둘의 위험한 욕망도 표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바이올린 플레이어>는 다분히 현실적이다. 음악가의 삶을 다룬 많은 영화가 음악에 대한 숭고한 열정과 고뇌를 그리는데 집중했다면, 이 영화는 그들조차도 어쩔 수 없는 인간임을 적나라하게 내보인다.
네가 무얼 느끼든 그건 좋은 거야
지휘자는 연주자에게, 교수는 학생에게 왜곡된 욕망을 드러낸다. 연주자와 학생 역시 지휘자와 교수에게 제 욕망을 드러내길 거리끼지 않는다. 음악에 대한 열망이야 없겠냐마는 때로는 이 같은 욕망이 음악을 더 자극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이올린 플레이어>는 대단치 않은 영화이기도 하다. 바이올린이 아니더라도, 클래식이나 핀란드라는 공간이 아니더라도,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이야기다. 한국의 전통시장이나 편의점, 대학교, 학원, 병원,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장소에서 얼마든지 비슷한 이야기가 쓰일 수 있다.
무언가를 열망하고, 그 열망의 길에서 좌절을 맛보고, 또 그 좌절을 극복하거나 회피하기 위해 탐해선 안 될 것을 탐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슬퍼하고 만족하며 불안해하고 절망하지만, 영화는 그 모든 감정이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영화 속 지휘자가 카린에게 건넨 말과 같은 조언을 살면서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네가 뭘 느끼든 그건 좋은 거야"라는.
절망 그 자체보다 그 절망을 느낄 수 있음을 감사하는 업이 있다는 걸 나는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흔한 영화처럼 느껴졌던 <바이올린 플레이어>가 어딘지 특별하게 느껴진 건 바로 이 장면부터였다.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