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게재, <낙원의 밤> 영화평
박훈정. 한국 영화팬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 감독이 된 그는 영화판에서 손꼽힐 만큼 제 색채가 강한 연출자다. 신드롬이라 해도 좋을 인기를 누린 <신세계>는 과거의 조폭영화와 차별화되는 서정적 누아르라는 평가 속에 특별한 위상을 누리고 있다.
<대호> <브이아이피> <마녀> 등 연달아 발표된 차기작이 <신세계> 만큼의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으나 박훈정 스타일이 무엇인지를 한국 영화판에 새기기에는 충분했다.
<낙원의 밤>은 드라마와 범죄, 액션으로 변화를 꾀한 박훈정이 정통 누아르로 다시 돌아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조선말 호랑이 사냥꾼과 정보기관 요원들의 이야기로는 충분히 터뜨리지 못한 박훈정의 향기를 불법을 일삼는 조직폭력배의 이야기 가운데 제대로 구현한다니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조폭은 양날의 검이다. 자칫 범죄와 범죄자를 미화하고, 불필요한 폭력으로 자극적 재미만 추구한다는 비판을 받기가 쉽다.
절반의 타협, 박훈정 색채는 그대로
박훈정이 누구인가. 뛰어난 구성과 연출이 돋보였던 <브이아이피>에서 여성이 강간당하는 장면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는 이유로 젠더감수성 논란이 일었고 영화는 손익분기점조차 넘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여성이 주요한 역할을 맡기 어려운 누아르는 특히 박훈정에게 위험한 선택일 수 있었다. 여성이 배제되고 피상적으로 묘사된다는 쉬운 비판이 뒤따를 위험도 높다.
박훈정은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전작 <마녀>에서 자신의 연출적 색채를 줄이고 김다미와 조민수를 앞세웠던 것처럼 <낙원의 밤>에서 전여빈을 캐스팅해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대신 <마녀>보다 저 자신이 익숙한 장르에서, 익숙한 방식으로, 제 색채를 듬뿍 입혔다. 범죄를 업으로 삼다 잔혹한 살인까지 저지른 인물 태구(엄태구 분)를 주인공으로 삼아 극을 이끌고 태구의 주변에 재연(전여빈 분)을 자연스레 끼여들게 하며, 그로부터 의미 있는 감정의 움직임을 보인다는 점 등이 그렇다.
다른 점이라면 재연이 죽음을 앞둔 '여성'이란 것 정도인데, 여성이든 남성이든 특별한 차이를 불러오지 않는 역할이란 점에서 남성 누아르 영화에 여성을 끼워넣은 정도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제주에서 들려온 외로운 이들의 싸움
영화는 삶이 제 맘처럼 풀리지 않는 외로운 이들의 싸움이다. 태구는 조직폭력배다. 지역에서 군소조직을 이끄는데, 간간이 영역다툼이 있을 때마다 역할을 톡톡히 한다. 큰 조직에선 태구를 영입하려 하고, 태구는 의리를 지켜 제 조직에 남는다.
태구에게 조직을 빼면 누나와 조카가 전부다. 열심히 사는 누나는 태구가 조직폭력배인 게 못마땅하지만 사는 방식이 다르니 어쩔 수 없다.
그러던 어느 날 누나와 조카가 트럭에 받혀 세상을 떠난다. 모두가 큰 조직이 꾸민 일이라고 생각한다. 태구는 큰 조직 보스에게 응징을 가하고 제주도로 도피한다.
제주에서 태구는 재연과 만난다. 재연은 보통의 여자들과 다르다. 러시아에서 몰래 들여온 무기를 팔아치우는 삼촌(이기영 분)과 함께 사는 그녀는 내일이 없는 것처럼 말하고 움직인다. 권총을 사격을 하다 제 머리에 총을 겨누거나, 태구 앞에서 훌렁훌렁 옷을 갈아입는다. 제 삼촌을 민망할 만큼 함부로 대하고 태구에게도 별반 차이가 없다.
재연은 희귀병을 앓고 있다. 삼촌이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 것도 미국으로 가 더 나은 치료를 받게 하기 위해서다. 삼촌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재연은 저 스스로조차 함부로 대할 때가 많다.
수많은 클리셰 끝 감춰둔 승부수
영화는 수많은 누아르의 클리셰를 타고 큰 조직 간부 마 이사(차승원 분)가 제주로 오며 본격적으로 문을 연다. 힘 싸움과 배신, 희생양의 피를 필요로 하는 이들의 비열한 싸움이 제주도의 나른한 풍경 앞에 펼쳐진다.
마 이사는 태구를 쫓고 그 과정에서 재연도 위험에 빠진다. 감독은 마 이사와 태구, 태구를 배신한 두목(박호산 분)과 재연까지 좀처럼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네 인물을 엮어 이야기를 풀어간다. 팽팽했다 느슨해지고, 일그러졌다 완전히 쪼그라드는 이들의 감정이 박훈정 특유의 담백한 연출 속에서도 끈끈하게 묻어난다.
영화의 승부처는 마지막 10분이다. 그 외엔 남성 중심 세계 가운데 재연이란 여성 한 명을 덩그러니 던져놓았다는 점, 제주도라는 누아르의 배경으론 익숙지 않은 장소를 선택한 것, 진지한 이야기 속에서 웃음을 던지는 마 이사의 캐릭터 정도만이 기존의 누아르와 달랐다. 이것만으론 특별함을 얻을 수 없으므로 <낙원의 밤>의 성패는 마지막 10분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마지막이 대단했는지, 평범했는지, 특별한 감흥을 남기기엔 역부족이었는지는 보는 이에 따라 감상이 엇갈릴 것 같다.
비슷한 류의 영화를 제법 보았던 내겐 <레옹>과 여성캐릭터의 주도적인 역할이 조금 더 강해진 <니키타>, 범죄의 판 가운데서 여성캐릭터에 인간성을 잔뜩 불어넣은 <글로리아> 정도를 적절히 섞은 뒤 마지막 한 바탕 한풀이를 가미한 정도가 아닌가 싶었다.
이정도면 나쁘지 않은 결과겠으나, 박훈정이란 이름의 무게를 생각하면 이보다는 나은 작품으로 돌아왔어야 했던 게 아닌가 한다.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