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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야 Apr 02. 2024

노르웨이 이민 3년 차: 나의 성장과 경험 이야기

북유럽 노르웨이에 내 첫 발걸음을 내디딘 게 어제와 같은데 시간이 어찌나 빠른지 어느덧 노르웨이 이민 3년 차가 됐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한 해 한 해 지나가는 속도가 배로 빨라지는 것 같다.


노르웨이 이민 1년 차


당시 코로나가 활개 치던 때로 모든 것이 다 중단되고 노르웨이에서도 자택 근무 돌입으로 인해 레스토랑 등 서비스 업종은 인원 감축 등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기도 했다. 노르웨이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힘들었던 시기라 이민자에게는 더더욱 힘든 시기가 아닐 수 없었다.

비자 신청을 위해서는 이민국을 방문해야 했는 데 이민국 또한 업무시간을 줄여 예약 잡기란 하늘의 별따기가 아닐 수가 없었다. 특히 한국의 공인인증서와 같은 Bank ID를 만들기란 몇 개월이 걸리기도 했다.


그리고 노르웨이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또 그들의 문화, 특성을 체감하게 되면서 개인적으로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노르웨이 사람들은 먼저 다가오지를 않고 내가 다가가려 시도해도 눈에 띄는 관계 진척이 없어 '나에게 문제가 있나?'라고 나 자신을 자책하는 시기를 갖게 되기도 했다.


이후 현지언어인 노르웨이어를 배우는데도 마음이 동하지 않아 꽤 스트레스를 받았다. 노르웨이에서 앞으로 살아가려면 배워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개인적으로 노르웨이란 나라에 대한 환상이나 로망 자체가 없었을뿐더러 그것이 아니라더라도 흔한 여행 가고 싶은 나라로 생각해 본 적도 없었기에, 남편의 고국으로서 느껴질 뿐 개인적으로 노르웨이란 나라에 대한 특별한 감정이 없었고 또 노르웨이 현지인들의 차가움 또는 무심함에 자연스레 노르웨이어에 대한 감흥 또한 없었다.


이탈리아에서 있었을 당시엔 이탈리아어 하면 엄청 반겨주고 좋아라 해주는 이탈리아사람을 만난 반면, 노르웨이에서는 외국인이 노르웨이어 쓴다고 누구 하나 관심 가져주거나 하지 않는다. 좋게 보자면 언어로서 차별하지 않는 걸로 봐야 할까? 여하튼 그래서 겨우겨우 나의 멱살을 붙잡고 노르웨이어 코스를 들으러 가면 난민출신으로 온 외국인들, 비난민 출신 외국인의 말도 안 되는 행동에 현타를 많이 느꼈다.


그 말도 안 되는 행동의 예를 꼽자면 수업 시간에 핸드폰을 진동으로 안 해놓는 것은 기본, 전화 오면 수업 중이라 말하고 끊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통화를 이어간다. 음성 통화, 영상 통화 모두. 심지어 선생님이 통화를 나가서 하라고 하면 알았다고 하고 끊지만 그때뿐, 또 다른 학생이 같은 행동을 반복해 나간다. 학습이 안되나 싶을 정도로 황당했다. 그 외에 수업 시간에 떠드는 건 기본이고 별의별 일들을 다 겪게 되어 나는 방학 기간 포함하여 일 년 정도 노르웨이어 수업을 들었고 수업 진도도 어느 정도 수준 이상으로 나가질 않을 뿐만 아니라 위와 같은 기본예절 없는 사람들의 행동과 더불어 선생님들이 수업 시간에 주의를 준다던가 하는 등의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아, 가는 것 자체가 어느 순간부터 스트레스라 그만두고 독학으로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민 온 지 딱 일 년 된 시점에서 일을 구하게 돼서 일하면서 노르웨이인 동료들과 노르웨이어로 얘기하는 게 더 빨리 늘 것 같았기에 노르웨이어 코스를 그만둔 것에 대한 후회는 없었고 지금도 해당 결정에 대한 후회는 없다.


물론 이후에 노르웨이어가 늘긴 했지만 3년 차인 현재 시점에서는 노르웨이어 실력이 크게 향상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노르웨이에서 영어도 써야 하다 보니 그런 것 같다. 무엇보다 노르웨이어에 대한 애정이 아직도 딱히 없다. 생존하려고 배운 것이기에 어느 정도 의사소통 가능한 수준에서 자꾸 맴돌게 되는 것 같다. 이후 높은 레벨의 노르웨이어 수업에 몇 번 참여한 적 있으나 역시 예전에 배웠던 수준에서 더 나아가질 못한다. 한국처럼 고강도로 힘들게 가르치지 않기도 할뿐더러 수업 같이 듣는 사람들 중에 낮은 레벨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노르웨이에는 해당 낮은 레벨을 갖고 있는 학생에게 수업 난이도를 맞추는 편이다.


한국은 잘하는 학생을 챙겨주지만 노르웨이에서는 잘하는 학생 대신 못 따라오는 학생을 더 챙기는 편이기에 본인이 아니다 싶으면 바로 반을 바꾸던가 레벨을 더 올려가던가 해야 한다. 개인적 경험으로는 선생님이 잘하는 학생에게 반을 옮길 것을 권유한다던가 하지 않기에 본인이 알아서 아니다 싶은 건 말해서 시간과 돈 낭비를 줄이는 것이 좋다. 처음에는 왜 이러는 거지?라고 생각돼서 이해가 안 되고 나만 스트레스받고 그랬는 데 한국과 아예 정반대라고 생각하니 그나마 편해졌고 그저 지켜보는 것이 아닌 내 살길은 내가 알아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하게 됐다.



노르웨이 이민 2년 차


나에겐 이민 1년 차 때부터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노르웨이에 자가마련과 영주권이었다. 그리하여 이민 온 지 얼마 안 돼서 바로 일을 찾기로 결심하고 1년 차 때 부족한 노르웨이어로 더듬거리며 본 면접에 운 좋게 합격도 하게 됐다. 나의 전공과 관련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나의 현실을 파악하고 인정하는 게 중요했기에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평생 일이란 것은 없고 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할 수 없다는 게 이민자의 현실이기에 당연하게 느꼈다. 한국에서 사는 이민자의 상황이 노르웨이에서 사믄 나의 상황과 별다를게 없다 생각했다.


그렇게 노르웨이 이민 2년 차 때는 경험을 쌓고자 이곳저곳 이력서 넣어 면접도 여러 번 보고 면접 본 곳마다 합격이 되어 한때는 투잡, 쓰리잡을 뛰기도 했다.


노르웨이에서는 직업 구할 때 한국과 달리 추천인이 필요한 데 자진해서 나의 추천인이 되어주겠다는 동료들을 만나게 되어 최종 면접 당시 어렵지 않게 통과할 수 있었다. 추천인이 뭐가 그리 중요할까 싶지만 이 나라 사회에선 꽤나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내가 물어보기도 전에 추천인이 되어주겠다고 한 그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느꼈다.


노르웨이에서 자가마련과 영주권 신청을 위해서는 더 나은 소득이 필요했고 당시 일하던 곳의 문제로 인해 겸사겸사 나는 이직을 본의 아니게 더 빨리 준비하게 됐고 준비하고서 3개월 안에 운 좋게 이직을 하게 됐다. 더 좋은 조건은 덤으로 얻었다.


그리하여 쉽지는 않았지만 이민 3년 차에 접어들기 전, 나는 남편과 노르웨이에서 자가를 마련하게 됐다. 부모님의 도움 없이 오롯이 우리의 힘으로 해내 뿌듯했다. 이민 2년 차 때 개인적으로 노르웨이 직장 문화로 인해 마음 고생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나에게 더 좋은 일이 일어났다.


이직을 더 좋은 조건으로 하게 됨으로써 영주권 신청 또한 문제없이 진행할 수 있다. 영주권 신청 중 다양한 충족 요건이 있는 데 그중 가장 중요한 소득요건이 충족 됐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현재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이루고자 한 목표 두가지를 달성했다는 사실에 큰 감사를 느낀다.


노르웨이 이민 3년 차

 


2024년 4월, 노르웨이 이민 온 지 3년 차가 됐다. 지난달에 2주 동안 감기로 고생하면서 노르웨이 의료시스템에 다시 한번 안 좋은 경험을 하게 되면서 이민 생활에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노르웨이는 감기로 약 처방받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약 처방받으려면 없는 증상도 좀 만들어가면서 연기를 해야 한다고 주변에서 말할 정도인데, 또 의사마다 너무 가지각색인데 나의 주치의는 로봇 마냥 내 증상은 듣지도 않고 자기 할 말만 해서 벽과 대화하는 것 같아 몸도 힘든데 계속 설명하고 대화를 시도해야 하는 게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그래서 결국 엄마와 통화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눈물이 터졌다. 아니, 감기 하나로 이렇게 2주 가까이 고생할 일인가? 어이없고 이 상황이 허무하면서도 아프니 입맛도 없고 기운이 없는 데 뭐는 먹어야겠고, 근데 하필 한국에서 먹던 죽이 먹고 싶은 데 현실은 그럴 수 없어 몸도 마음도 힘든 그런 상황이 되버렸다.


나와 통화하던 엄마는 나에게 "엄마가 비행기표 끊어줄 테니 한국 올 수 있어?"라고 물었다. 딸을 걱정하는 엄마의 마음에 또 무한정 눈물이 났다. 진짜 마음 같아선 바로 간다 하고 싶었지만 노르웨이에서 그간 이뤄온 삶에 대한 책임이 있으니 또 무작정 다 뒤로 하고 갈 수도 없었다. 그리고 이정도도 못참으면 앞으로 어떻게 할까 싶어 나 자신을 더 다잡게 되었다.


이후 시간이 지나고 몸은 회복되었지만 요즘 내내 한국 가고 싶은 마음이 부쩍 많이 든다. 이민 3년 차에 접어들어 그간 참고 있던 마음이 터져버린 향수병의 전조 증상인 걸까?


노르웨이에서의 내가 하고자 한 다음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현재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 맞는 데 쉽지가 않다. 이것이 어른의 삶이자, 이민자의 삶인가 싶어 내심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노르웨이에서의 이민 생활을 접고 고국으로 떠난 외국인 친구들을 하나둘 볼 때면 나도 나는 노르웨이에서 몇 년이나 살까?라는 마음도 들기도 하며 헛헛한 감정이 든다. 또 어떠한 날은 그래, 여기가 이제 나의 제2의 고향이다라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민 3년 차에 접어든 이 시기에, 무엇보다 진하게 내 마음에 스며드는 단 하나가 있다면 그건 바로 <나는 한국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한국인이라서 자랑스럽다>는 것이다.


노르웨이에서 얼마나 오래 살든 이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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