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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야 Jun 23. 2024

노르웨이 사람과 한국 사람은 찐친이 될 수 있을까?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여행으로 방문한 노르웨이의 첫인상은 의외로 긍정, 호의였다. 거의 모든 사람이 다 영어를 할 줄 알았고 깨끗한 공기와 산이 어우러진 자연에 웅장함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여행객과 이민자의 삶은 너무나도 달랐다. 결혼 생활에 비유하듯 이민 생활 1,2년 동안은 신혼 기간이라고 하지만 이민 오자마자 따뜻함, 다정함을 느낄 수 없고 그저 무심하고 차갑게만 느껴지던 노르웨이의 문화와 사람들에 마음의 상처를 받으며 이민 일 년 동안은 힘든 시간을 보냈다. 물론 지금도 그 상처의 흔적은 내 마음에 남아있지만 더 이상 날 힘들게 하진 않는다. 오히려 그런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 내가 그 상처를 마주 보며 이렇게 글로 적을 수 있지 않았나 싶다.


한국 사람만의 특징이 있듯 노르웨이에 사는 노르웨이 사람들의 특징에 대해 알아가고 적응해가다 보니 운이 좋게도 노르웨이 사람들과 사적으로 커피 마시는 정도로 친해진 경우 또는 파티 자리에 초대받는 경우가 생겼다. 그중 만난 친구들은 포옹을 나누고 서로 보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의 사이로 만족감을 느끼고 있지만, 한국어로 찐친으로 부를만한 노르웨이인 친구는 아직까지 없다.


물론 찐친으로 가는 단계에 있던 친구도 있었는 데 “아 역시 이 친구는 전형적인 노르웨이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느끼게 해주는 행동이나 말을 듣게 되면 한국말로 흔히 정 떨어지는 그러한 순간을 반복적으로 마주했다. 그리하여 그 친구와는 서로 캐주얼한 대화를 나누며 편안함과 하하 호호 웃는 즐거움이 유지되는 사이에 머물기를 택했고 나의 속 얘기나 진중한 얘기를 나누지는 않는다.


이러한 행동을 내리기까지 여러 경험을 하게 됐다. 그중 하나를 에피소드를 뽑는다면,

나(한국사람), 아만다(가명, 영국인) 그리고 잉그리(가명, 노르웨이인) 이렇게 셋이서 친해져서 종종 모였는 데 당시 나와 아만다는 직장에서 고충을 겪고 있었고 이런 힘든 과정을 일일이 문자로 치기가 뭐해서 해당 일을 논의하게 위해 만나기로 했는 데, 아만다는 이미 직장을 그만둔 상태였고 나는 어쩌지 하는 상황이었다.


나의 상황을 다 설명했고 이를 들은 아만다는 내가 겪은 상황에 함께 공감하며 어이없어하고 같이 욕한 반면 잉그리는 “난 중립이야. 난 스위스(중립)이야 “라며 내가 겪은 상황에 자기 의견을 드러내기 거부했다.


노르웨이 사람들 특성 중 하나가 시시비비를 가리는 걸 꺼려하고 자기의 의견을 잘 드러내지 않지만, 어제 알게 된 사이도 아니고 친구 관계에서 어떻게 저렇게 반응할 수 있을까 황당해서 말문이 턱 막혔다. 그 말을 들은 아만다도 말을 잃었다.  


누가 들어도 제 편을 들어줄 법한 상황일정도라 이 친구가 저를 위해 뭐 해주길 바란 건 없었고 친구로서 ”속상했겠다 “ 정도의 공감은 해줄 수 있지 않나 의아했다.  


만나기 전에 빨리 만나서 얘기하자고 나를 걱정하는 눈치였지만 막상 만나니 자꾸 대화 주제를 자기 가족 얘기, 틱톡 화제 영상 등으로 산으로 이끌어 가며 이 상황 자체를 논의하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우리의 상황과 관련 없는 이야기만 주야장천 듣다가 헤어지고 나니 허무감이 몰려왔고 이 이상의 친구, 인간관계로 발전 및 성장하기는 어렵겠다는 것을 이후에 그 친구에게 몇 차례 더 느끼고 현재의 거리에서 친분을 유지 중이다. 각자 성장해 온 환경이 다르다고 내가 이러한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고 말해도 이해를 못 하거나 한참 시간을 걸리기에 그리고 이러한 특성을 가진 친구들은 대체적으로 내가 너에게 이러한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는 피드백조차 수용을 못하기에 아니다고 느끼는 사람이 먼저 그 친분의 거리를 정하는 것이 더 낫다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이제 10대도 아니고 얘가 내 편 안 들어주고 중립이라고 했다고 내치거나 손절할 것까진 없는 것 같다. 결국 사람 사는 것은 다 똑같고 이 친구도 언젠가 본인의 인생에서 비슷한 상황에 놓이면 그때 나의 감정을 이해할 것이기에 굳이 가르치고자 나설 이유도 없다. 노르웨이 사람이라고 다 그러는 건 아니니까.

이래서 결국에는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만나게 되는 거고 끼리끼리라는 말이 생긴 것 같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일찍 독립해서 셰어 아파트에서 많이 거주하는 데, 룸메이트 두 명이랑 함께 생활 중인 나의 직장 동료(노르웨이인)가 나에게 자기가 너무 이해 안 되는 상황을 겪었다며 나에게 얘기를 좀 듣고 자기가 잘못한 건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 동료의 말에 의하면, 노르웨이인 룸메이트 두 명 중 A라는 친구가 동료가 아침으로 먹으려고 사놓은 빵을 허락도 안 맡고 먹어버려서 왜 그랬냐고 물었더니, A 왈 "너 거인지 몰랐어"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며 미안하다는 말도 없고 이를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다른 룸메 B에게 "내가 화나는 게 이상한 거야?"라고 물으니, "자기는 중립"이라고 둘 사이에 끼기 싫다며 자리를 피했다고 한다. 결국 이 동료는 자기 아침도 못 먹고 기분도 상하게 된 이 상황에서 자기가 화나는 게 이상한 거냐며 물었고 중립이라고 할만한 상황도 아닌 데 왜 중립이라고 말하며 자기 음식을 먹은 A는 미안하단 말도 없고 B가 자리를 피해버리니 자기가 꼭 잘못 없는 사람한테 뒤집어 씌운 상황처럼 돼버려 화가 났다고 전했습니다.


저는 당연히 그 A라는 친구가 너에게 물어봤어야 했던 게 맞는 거고, 내가 B라는 친구였다면 중립대신 중재의 역할을 했을 것 같다고 답하며 제 경험담도 들려주니 그 친구도 공감을 하며 둘 다 한참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물론 모든 대부분의 노르웨이 사람들이 “중립”을 택한다라고 일반화하고 싶진 않지만 이러한 상황을 불편하게 여겨 피하거나 답하지 않는 반응을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이 한국인이 아마 노르웨이 이민 초기에 답답함을 넘어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라는 갑갑함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부분이 아니지 않을까 예상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저는 타인공감능력이 정말 중요하다는 걸 노르웨이에서 뼈저리게 느끼게 됐답니다. 아마 본인이 부당한 일을 주변 노르웨이 사람들에게 말해도 아~라고 듣기만 하고 실질적 공감은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회사에서 부당한 해고, 대우 또는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겪은 사람들의 무심함 등 노르웨이 현지인들의 고충이 담긴 기사가 송출돼도 한국처럼 그것이 몇 날 며칠 동안 이슈화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저 한나절의 기사에 불과하죠. 이러한 차가운 독자들의 반응에 자기가 겪은 안타까운 경험을 공론화하는 사람들의 용기가 대단하다고 느껴집니다. 노르웨이에서는 침묵을 택하는 이들이 많으니까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정말 가뭄에 콩 나듯, 공감 잘해주는 노르웨이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저도 운이 좋게 그간 살면서 노르웨이 사람 한 명에게 감동이란 감정을 느껴봤습니다. 대부분 무반응으로 일관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기에 이 친구의 공감 능력에 "이 친구는 도대체 뭐지?"라는 신비감이 느껴지기도 해, 그 친구에게는 어느 날 "나 진짜 너 같은 노르웨이사람 처음 만나본다. 너무 고맙다."라고 말하니 박장대소를 하며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공감하기도 했습니다.


노르웨이 사람들이 반응을 하지 않는 이유, 침묵/무심함을 택하게 된 전반적인 사회의 배경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현지에서 일하면서 현지 사람들을 관찰해 보면 현지인 포함 외국인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감사하다. 죄송하다"말하는 법을 잘 가르치지 않고 공공예절을 가르치지 않았던 적이 훨씬 많았습니다.


설령 아이가 실수를 해서 일어난 일인데도 해당 상황을 못 본 체하고 사과 하지도 않고 그저 자기 할 일, 갈길만 가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아이는 자기가 잘못을 안 눈치인데 부모가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자, 부모 행동을 읽은 아이는 이 상황을 그냥 넘기고 이러한 상황을 지속적으로 반복학습 하겠죠?


아마 그 부모들도 본인 유년시절에 부모나 주변 어른들에게 그러한 가르침을 받아본 적도 없었을 확률이 높고 또 타인의 불편한 감정을 읽지 못하고 본인의 감정을 또 어떻게 표출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죠. 시큰둥한 반응, 그저 아~ 아이고~라며 형식적인 안타까운 대답만 할 뿐 실질적으로 깊은 공감, 가르침을 받아 본 적이 없기에 그런 건가라고 추측만 할 뿐입니다.


노르웨이에서 느낀 놀라운 점은 퇴근 시간이 비교적 빨라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저녁 시간이 있어 가족애가 한국만큼 끈끈하고 대단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어떻게 이렇게 무심할 수가 있는지 느껴지는 부분이 더 컸습니다.


한국에서는 부모의 희생정신이 너무 강조되어 왔지만 결국엔 자식에 대한 크나큰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모든 것에는 장단점이 있기에 현재 한국 사회에서 크나큰 문제로 자리 잡게 된 저출산을 대표적으로 다양한 문제들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겠죠.


이와 반면 노르웨이에서는 부모들로부터 자식들을 위한 뒷바라지 등을 하는 경우를 아직 눈으로 직접 보진 못했습니다. 부모의 희생이라는 단어도 아마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한 외국인 친구가 엄마의 환갑 생신 때 파티 주최와 좋은 선물을 사주고자 밤낮없이 투잡을 뛰며 열심히 일했던 적 있는 데 이를 본 그녀의 노르웨이 배우자와 시어머니는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라고 물으며 엄마 생신을 위해 왜 그렇게 너를 힘들게 하며 일해야 하는지 의아하듯 물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자식과 부모 간에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딱 내가 힘들지 않은 만큼 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자기 자식을 끔찍이 아끼는 건 마찬가지겠지만 한국에서 자라온 저에게 개인적으로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가족이란 이름 아래에 성인이 될 때까지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지만 성인이 되면 각자도생 하는 느낌이 가까웠습니다. 여기도 부모 도움 없이 자립하기란 쉽지 않은 게 현실이기에 그러한 부분이 개인적으로 차갑다고 느껴지기도 했고요. 한국처럼 부모가 지원해주지 못해서 미안해하거나 안타까워하는 경우를 아직까지 제 경험을 포함해 나와 비슷한 환경에 있는 외국인 친구들의 시댁 식구, 노르웨이 친구들 경험을 통틀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습니다. 어려운 환경에 아쉬워하는 것 같지만 굳이 표현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찐친이라는 주제로 시작했지만 결국엔 자라온 환경, 배경이 이렇게나 다르기에 각 나라의 특성을 고려했을 때 한국 사람과 노르웨이 사람이 베프가 될 수 있겠지만 그게 쉽지는 않다는 결론 아닌 결론을 내리게 됐습니다.


노르웨이에서는 한번 친구가 평생 친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번 친해지면 인생 친구를 얻는다고 말하지만, 외국인들에게 그들의 '친구' 문턱을 넘기가 발끝하나 들이밀기란 정말 쉽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모든 사람들을 일반화할 순 없기에 노르웨이 사람, 한국 사람이 만나 인생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는 가능성은 존재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하지만 노르웨이에서 만난 외국인 친구들과 노르웨이 사람들의 특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결국 다 같이 노르웨이 사람들과 감정 소통의 어려움을 겪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중 한 친구는 저에게 이런 말을 전했어요. “노르웨이어가 내 모국어가 아닌 게 다행인 것 같기도 해. 노르웨이어가 모국어였으면 내 감정표현을 제대로 할 수 없었을 것 같아. 감정 표출하는 게 되게 제한되어 있다고 느껴져. “라고 말입니다.


결국엔 그간의 경험과 더불어 이 글을 작성하는 순간순간마다 결국엔 인종을 떠나 사람과 사람으로서 서로의 고충과 경험담을 나누며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공감하고 이를 자유로이 말할 수 있다는 게  또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 일인가라는 것을 상기해 보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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