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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래된 정원 Jan 19. 2021

강화 도령

아버지 이야기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20년이 되어간다. 


우리 아버지는 2002년 내가 첫아들을 낳던 해 내 나이 만 29세, 아버지 나이 만 59세에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많다. 나는 평생, 아버지는 우리 삼 남매 중 특별히 나를 더 아끼신다는 확신을 갖고 살아왔다. 국민학교 2학년 때였다. 책상 앞에서 숙제를 하고 있는데, 방으로 슬쩍 들어오셔서 내 뒤통수를 쓰다듬으시며 "언니랑 동생한테 말하지 말고 이거 너 해라. 너만 주는 거다." 하며 샤프펜슬을 건네주셨을 때 나는 확신했다. 아버지가 나를 제일 좋아한다는 것을.

아버지는 뛰어난 이야기꾼이셨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을 때 나는 언제나 재미있고 신나고 즐거웠고, 나 역시 그런 아버지 앞에서 스스럼없이 찧고 까불며 내 이야기들을 자유롭게 펼쳐놓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느꼈던 내 두려움 중에 하나는 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와 추억들이 세월과 함께 잊혀 버리게 되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생각하긴 했다. 어딘가에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글로 남겨두리라. 하지만 살림하며 애 키우며 살다 보니 20년이라는 시간은 후다닥 날아가 버렸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완전히 잊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잘 되었지 뭔가. 실컷 각색해서 남겨 두련다. 누가 뭐랄 것인가.   


우리 아버지는 1942년 생 말띠이다. 고향은 강화. 가끔씩 서울내기인 우리 엄마가 아빠를 무시하고 싶으실 때, 강화도령이 출세했지 하면서 은근히 놀리곤 하셨다. 당시에는 누구나 형제자매가 많았겠지만, 우리 아버지 역시 형제자매가 많으셨다. 위로 형님이 한 분, 누님이 네 분 계셨고, 그다음에 우리 아버지와 아버지 바로 밑으로 여동생이 한분 계시다. 이렇게 7남매가 정실이셨던 우리 할머니의 자녀들이고, 첩을 들이셨던 우리 할아버지의 둘째 할망구-정실 자식들 편에서는 밉디 미운 그분을 그렇게 불렀었는데, 어린 내 귀에는 참 듣기 거북했었다. 여하튼, 그 할머니 편으로 서너 명의 자녀들이 더 있었다. 아버지는 계모의 학대에 대해 특별한 언급이 없으셨지만, 한도 많고 눈물도 많은 고모들을 통해 들은 바로는 그 할망구께서 정실이셨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자 그야말로 콩쥐팥쥐가 따로 없는 계모 노릇을 하셨었다고 하니 억울하고 한스러운 세월을 살아내신 고모들이 그 얄미웠던 계모를 뒤에서 할망구라고 부른다 한들 그게 뭐 대수인가. 그야말로 지금 고모들이야말로 다들 할망구가 되신 이 마당에 말이다.  


큰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와 열일곱 살 차이가 지셨다는데 과연 그게 가능하였던 시절이었다. 나는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우리 할머니께서 시집올 때 나이가 십 대 중후반 정도 셨을 것이고 7남매를 띄엄띄엄 다 낳으셨을 때도 기껏해야 마흔 초반이나 되시지 않았겠나. 그러니 예전에 마흔 나이에 손주 보는 것은 큰 일도 아니었고, 며느리와 동시에 배부르고 출산하는 것도 허다했을 것이다. 여하튼, 우리 아버지는 큰 아버지가 장가를 가서 인천으로 분가하셨을 때 형님 댁에서 중학교부터 유학생활을 하셨다고 하니 아버지에게 있어 형님은 함께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던 형아가 아니라, 아버지급의 권위를 가진 가장이었다.  

한편, 아버지의 형수 님되시는 우리 큰 어머니로서는 콩알만 한 중학생 시동생이 얼마나 탐탁잖은 군식구였을꼬. 도시락 다 싸서 학교 보내야 하는 시동생. 게다가 아버지는 보통 8살에 들어가는 초등학교를 6살에 들어가셨다고 하니 중학교 1학년 이래 봤자 초등학교 5학년인 셈이셨다. 큰 어머니로서는 그냥 초등학생 아들 하나가 더 생긴 것이다. 당시 큰아버지도 자식들이 줄줄이 있었으니 우리 아버지가 먹었을 눈칫밥은 얼마나 눈물 젖었을 것인가. 하지만, 나도 이제 주부가 된 지금 생각해 보면, 큰 어머니 입장도 전혀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아니, 나라면 절대 못했을 일다. 그래도 큰 어머니는 그 일을 하신 것이다. 감사한 일이다.

다행히 아버지는 총명하셨던지라 공부도 잘하셨고, 조카들 공부도 봐주면서 완전 천덕꾸러기 신세는 면할 수 있었다. 간간히 눈칫밥을 먹던 날도 있었을 텐데 그럴 때는 공부 봐준다는 핑계를 대며 만만한 조카의 까까머리에 꿀밤을 날리곤 하셨겠지. 어머니를 여읜 지 얼마 되지 않은 12살의 소년이, 엄마 노릇 대신 해 주던 누나들과 할아버지, 할머니 계신 고향을 떠나 서늘하고 어렵기만 한 형님과 형수님 밑에서 살아가야 하는 도시 생활은 얼마나 외롭고 쓸쓸하였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시절의 우리 아버지가 참으로 측은하고 가여워서 나는 지금도 가끔 누워서 아버지 생각을 할 때면 나도 모르게 베갯잇에 눈물을 적시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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