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흘러도 흔적은 남았다.
망설임 끝에 캐나다 이민을 결정했다. 떠난다는 것은 현재의 삶이 징글징글하거나 확실하지도 않은 어떤 유혹에 흔들렸기 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의 결정은 등 떠밀려 나서듯 갑작스러웠다. 이민 가방 여덟 개에 담긴 애환이 우리에게는 이민의 시작이었고, 이민의 이유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이유의 전부였다. 망설임도 설렘도 지나가는 봄날의 꿈처럼 아련하다. 유학이나 이민, 비자를 받고 캐나다에서 정착하려면 출국하기 전에 캐나다 정부가 지정한 병원에서 신체검사를 받아야 한다. 건강상의 결격사유 확인을 위한 당연한 절차이다. 비교적 간단한 신체검사지만 혈액, 시력, 소변 검사, 그리고 엑스레이 흉부 촬영을 포함한다. 8월 어느 뜨거웠던 여름날에, 나는 강남 세브란스 병원에서 약 두 시간에 걸친 신체검사를 받았다. 여지없이 나는 결핵 관리 대상으로 지정되었다. 그토록 미로 같던 길을 걷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기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폐에 대한 엑스레이 판독 결과는 결핵균이 더는 활동하지 않는 비항산성 결핵균. 나는 결핵균 보균자이다.
사실 만 19세가 되던 해, 병역 판정을 위한 신체검사에서 나는 신체 등급 5급을 받았다. 결핵의 흔적 때문이다. 신의 아들이거나 장군의 아들이 아니었던 나에게 면제 등급은 사치에 불과하다. 징병제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신체 건강한 남성에게 신체검사의 의미는 현역으로 병역의 의무를 완수했고, 남자들의 시시콜콜한 얘기에 군대 얘기를 거들 수 있는 계급장을 붙인 것과 같다. 나는 현역이 아니라는 판정을 받았고, 불합격 인생이라는 낙인을 받은 것처럼 철렁했다.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하고 살았던 나는 뼛속 깊이 대한 사람이다. 군대에 가야 할 당위성을 군의관에게 읍소했다. 나의 전략이 갸륵하게 받아들여졌던 것일까. 결과적으로 나의 신체 등급은 4급으로 바뀌었다. 보충역으로 편성되거나, 군 면제와 비슷한 단계였지만 당장 결과를 유보하고, 다시 판정을 받을 기회가 주어졌다는 기대. 입대 장병의 신분으로 훈련소에서 신체검사를 받고, 불합격자는 귀가 조처를 받는다. 이제는 군부대 통폐합 조치로 해체되어버린 강원도 춘천 102 보충대로 입영했고, 강원도 철원의 최전방 부대에서 군 생활을 마쳤다. 피를 토하고 살았던 흔적을 지닌 채, 피 끓는 청춘들의 공동 막사에서 꼬박 삼십 개월을 살았다. 누구보다도 뜨거웠고, 치열했으며, 그리고 절박했던 심정 하나로 버텼던 시절, 누구 하나 나의 병력을 눈치챈 사람은 없다. 나는 아무도 전염시키지 못하는 결핵 보균자이다.
그때 처음 내가 결핵을 앓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도 흔적은 남는다. 새까만 엑스레이 사진 위에 산산조각이 난 유리 파편처럼 아스라이 반짝거리던 상처의 조각들. 폐결핵을 앓고 지났던 흔적이다. 우리 가족은 확인을 안 했을 뿐, 아마도 모두가 결핵 보균자일 것이다. 서로 어떤 토의도 거치지 않았지만, 피를 토했던 아버지가 남긴 유산을 공평하게 나누어 가졌는지도 모른다. 결핵균은 극한 환경에도 살아남는다. 나병균과 같은 항산성균으로 극한의 산성 또는 염기성 환경에서도 독하게 버틴다. 지방 성분의 튜브를 타고 공기를 날아다니기 때문에 일반 마스크로는 예방이 불가능하다. 어머니는 거의 매일 수저를 포함해서 그릇 등의 살림살이를 펄펄 끓는 물에 삶았고, 주기적으로 이불과 옷가지를 햇볕에 말렸다. 나는 적어도 컵 하나, 수건 한 장도 가족들과 나누어 쓰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표시 없이 각자의 방식대로 열병을 앓았을 것이다. 누군가는 심하게 기침을 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피를 토한다는 심정을 스스로 체득했을 것이다. 어머니도 결핵을 앓았던 흔적이 남았고, 누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를 제외한 우리는 한 번도 결핵약을 먹거나 치료를 받아본 적이 없다. 동생들이 결핵을 앓았는지 확인하지 못했을 뿐, 결핵은 온 가족을 휩쓸고 지나갔다. 피비린내 나는 상처의 흔적을 가보라도 되는 양 모두가 나누어 가진 우리는 독한 가족이다. 그리고 나는 그 독한 가족의 장남이다.
캐나다에 도착해서 결핵의 흔적 때문에 다시 혈액검사와 엑스레이 사진을 찍었다. 혈액은 몸 전체를 순환하면서 산소와 영양을 공급하고, 노폐물을 배설기관으로 보낸다. 한 사람의 건강 상태를 비교적 간단한 방법으로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지표가 혈액검사이다. 헌혈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양의 피로 건강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주삿바늘을 꽂고, 피가 빠져나간다고 느꼈을 때, 다시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깨어났을 때는 위급상황을 알리는 빨간 비상등이 돌아가고, 경고음이 울리고 있었다. 한 달 후에 재검사할 때도 다시 의식을 잃어버렸다. 이후로는 피검사를 할 때마다 기절하는 증상을 말한다. 친절한 간호사들은 침대에 눕혀서 혈액을 채취한다. 이미 쓰러져버렸기 때문일까. 의식을 잃어버리지는 않는다. 그리고 일주일마다 객담검사를 했고, 두 주에 한 번은 엑스레이를 찍었다. 결핵 센터에서 반갑게 나를 맞아주던 의사는 은퇴한 의사였다. 무엇을 말하는지 귀를 쫑긋 세우고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중얼 내뱉고 있었다. 나이 탓이었으리라. 천천히 분명하게 다시 말해달라는 정중한 부탁도 소용없었다. 객담검사는 단순히 침을 뱉는 것이 아니라, 폐부 깊은 곳에서부터 가래를 끓어 올려 뱉어내야 한다. 결핵균 배양검사를 통해 활동성을 판단한다. 결핵균은 보통 다른 세균들에 비해서 현저하게 느린 속도로 성장한다. 검사 결과도 최대 8주 후에 알 수 있다. 수십 번 결핵 센터와 병원을 오갔다. 그들에게 나는 잠정적으로 결핵 환자였다. 돈을 받지도 않으면서도, 진지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꼬박 오 년을 채울 때까지 처음에는 매주,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삼 개월, 육 개월, 일 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았다. 차후에도 언제든지 결핵균은 다시 활동할 수 있고, 앞으로도 계속 정부로부터 관리를 받을 수 있다는 섬뜩한 경고와 제안. 독해질 대로 독해져 버린 나의 대답은 이미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비로소 친절하고도 독했던 캐나다 정부의 결핵 환자 관리로부터 해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