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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 Mar 09. 2022

쉴 수 있는 용기

그날의 잠은 달콤했고, 뜨거웠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은 모두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타올랐다가 사그라져버린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는 불구덩이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다가도, 타다닥 장작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재가 되어 풀풀 날아가 버렸던 것은 아닌지 미련이 남는다. 그래서 하염없이 부지깽이로 불길을 뒤적거렸던 것은 아닐까. 그 후로도 몇 번인가 더 기절했다. 아주 잠깐이라도 의식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아침에 샤워하다가 한 움큼씩 빠지는 머리카락처럼 섬뜩하다. 깨어났을 때는 어딘가 쓰리고, 허전하다. 후회나 슬픔의 감정과는 다르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무언가를 놓쳤는데, 잃어버린 것에 대한 정확한 실체를 모르는 불안. 뒤뜰 마당에서 아침 공기를 들이마시다가 기절을 했었고,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반짝거리는 광경에 취해서 쓰러졌던 적도 있다. 책상 의자에 앉아 있다가 그대로 의식을 잃고, 얼굴 한쪽이 바닥에 긁히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기억의 일부분이 떠내려갔던 장소는 대부분 집이었고, 그리고 오전 시간이었다는 것. 사라져 버리는 모든 것은 예고도 없이 다가왔다가, 무엇인가 단단히 붙잡고 있었던 아련한 감촉만 남는다. 쏟아지던 빗소리에 급하게 우산 하나를 챙겨 들고 나서던 어느 날 아침, 차창 밖으로 아스라이 사라지는 풍경에 취해 내달리던 버스 의자에 덩그마니 남았던 우산 하나 그리고 오락가락하던 빗줄기 같다. 


 그 애가 선물이라며 수줍게 건네던 우산은 검은색이었다. 비를 좋아한다던 말을 기억했을 것이다. 비를 너무 많이 맞고 다니지 말라는 말도 했다. 우산을 챙길 때마다 버스에 두고 내렸던 그 애의 작은 우산이 생각난다. 우산을 잃어버리던 순간, 그 애를 향한 나의 순정에 금이 가버렸던 것인지, 내 인생에 가장 지고지순했던 사랑을 그렇게 잃어버렸다. 그날도 비가 왔다. 유리창으로 비는 내리고, 차이코프스키의 사계 중에 가을의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우산을 쓰고 걷는 사람들의 표정을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쳤다. 도로 양옆으로 블루베리 농장이 펼쳐지면, 멀리 레이니어산 정상의 만년설이 더 가깝게 느껴진다. 비 오는 날에는 블루베리 나무에 물들기 시작하는 단풍과 설산의 대비가 흐릿하다. 갑자기 눈앞이 뿌옇게 변하고 있었다. 목을 조이는 것처럼 답답했다. 어떻게 차를 세웠는지 기억이 없다. 깨어났을 때는 옆을 지나가는 차가 경적을 울리며, 고개를 돌려 내 쪽을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살짝 열린 창틈으로 공포가 밀려 들어왔다. 만약 이렇게 운전을 하다가 기절을 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실제로 나에게 일어났다. 사람이 당황하면 세상은 정지 화면처럼 느리게 움직인다. 생각이 온통 뒤엉켜서 버벅거린다. 의식이 멈추던 순간과 브레이크를 밟았던 순간과의 접점을 나는 어떻게 찾았던 것일까.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왔다. 쉴 수 있는 용기가 없었다. 십 대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새벽에 신문 배달도 해봤고, 주말이나 방학에는 친구 아버지를 따라 노동일을 했다. 사는 동안 한 번도 침대에서 낮잠을 자 본 적이 없다. 군 생활 중에도 누구에게나 달콤했던 낮잠 시간에 나는 책을 읽거나 공부를 했다. 조금 피곤하다고 느낄 때는 의자에 앉아 잠깐 눈을 붙이는 불편한 휴식을 선택했다. 버스를 타고 갈 때가 제일 곤욕스러웠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그토록 잠이 쏟아졌던 이유를 모르겠다. 사람들이 내뱉는 숨소리에 괜히 신경이 쓰이고, 이리저리 흔들릴 때마다 멀미가 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깜빡 잠이 들곤 했다. 나의 악몽은 대부분 버스 안에서 이루어진다. 잠든 버스에서 불현듯 깨어나면 낯선 종점에 도착해있고, 온갖 무시무시한 난관을 헤치고, 무언가를 찾아서 다시 돌아와야만 한다. 아마도 우산이었을 것이다. 꿈속에서 그렇게 헤매고 다녀도 한 번도 찾은 적이 없다. 또 한 편은 졸다가 버스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는 꿈이다. 버스 안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큰 소리로 깔깔거리며 웃는 사람들은 비교적 순진한 얼굴을 가졌다. 한심한 눈빛으로 비웃는 사람들도 있다. 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해서 누군가를 깔보는 표정을 감출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의식 속에서도 버스에서 졸고 있다는 것이 사치처럼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그날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는 희미하다. 하루 내내 침대에 누워 있었다. 잠에 취해서 섣부른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일까. 내가 스스로 자신을 얼마나 얕잡아 보고, 함부로 대하고 살았는지 더는 감출 수 없었다. 진짜 무서운 것은 세상의 조롱이 아니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한 아무도 나를 사랑할 수 없다는 자각. 잠시 멈출 수 있는 용기. 내가 그동안 잃어버리고 살았던 것은 세월이 흐르면서 다른 것으로 대체되었다. 잃어버린 우산 때문에 늘 비를 맞지는 않았다. 때로는 스스로 비에 젖지 않도록 다른 우산을 펼쳐야 한다. 세상 전부가 나를 향해 돌을 던진다 해도, 나만은 나를 감싸 안고,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 줄 수 있는 용기. 나는 정말 오랫동안 깊은 잠에 빠졌다. 그날의 잠은 달콤했고,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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