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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퇴사만화 Jan 11. 2021

<명랑한 은둔자> 책에는 내가 있다

명랑한 은둔자 리뷰 1탄 (글 하나로는 모자라)

“이건 완전 내 얘기잖아!”     



지난 주말, 캐롤라인 냅이 쓴 <명랑한 은둔자>를 읽으며 한 말이었다. 나라는 인간의 생활상과 내 속의 무수한 생각들의 똬리가 이 속에 아주 지적이고 상세하게, 또 수려한 문장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왜 나는 사람들을 만나지 않게 되었는지, 친구 관계의 끝이 찾아왔다는 걸 언제부터 빠르게 캐치하게 되었는지, 오랜 친구보다 매일 정기적으로 강아지 산책을 하며 만나는 친구들이 왜 더 편안한지. 그리고... 나는 왜 불안한지.      


그 이유들을, 그 원인들을 정리해보고 싶었는데 언젠가부터 생각에 탄력을 잃어서 끝까지 골몰하는 일이 어려워진 탓에 아예 생각하기를 멈춘 것 같다. 내 안에서 끌어 써야 하는 것들은 이미 다 끌어 써서, 월급이라는 짜릿한 지폐가 투입되지 않으면 무언가를 토해낼 수도 없게 된 게 분명했다. 밑천이 다 떨어져서, 급기야 돈도 없는 주제에 대학원이라도 가야 하나 생각이 든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 나라는 인간을 탐구하고, 더 깊이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자극이 없이는 안 될 것 같았다.



-내 경우, 가장 중요한 과제는 고독과 고립의 경계선을 잘 유지하는 것이다. <명랑한 은둔자 중에서>



이전 회사에서 나는 유방암 확진을 받아 수술을 하고 복직을 한 바 있다.  방사선 치료가 남아 있었지만 회사를 다니면서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서둘러 (무리하게) 복직을 했다. 약 한 달간 회사와 병원을 오가는 동안 책 한 권을 출간했고, 팀장의 공석을 메웠다. 그때 나는 무척이나 외로웠는데, 왜인지 회사에서도 외톨이였다. 딱히 큰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신입 사원들은 나를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가끔 왜인지 묻고 싶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매일 아침 출근을 해서 말없이 일을 하고, 점심은 거르다시피 하며 병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5분간 방사선 통 위에 누워 내 오른쪽 가슴을 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을 약 한 달간 반복했다. 불 꺼진 집에 돌아와 불을 밝히면, 잠시 환해지는 듯했지만 불안은 감히 내쫓지 못했다. 그래서 완전한 암흑이 찾아오면 불안은 괴물 같이 나를 짓누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동생이 집 앞에 왔다고 커피 한잔하자며 전화를 했다. 근처 커피숍에서 만난 우리는 여느 남매답게 시시껄렁한 알맹이 없는 대화를 나누었는데, 평소와는 전혀 다른 이질감이 들었다. 내 스스로의 선택으로 부모님과 떨어져 혼자 지내고 있었는데, 남동생과 대화를 하다 보니 내가 고독이 아닌, 고립의 상태에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말을 하고 있는 그 감각이 매우 낯설고 어색했다. 주어와 목적어, 서술어가 뒤섞여서 아무 이야기나 지껄이고 있는 기분, 말이라는 것을 너무 오랜만에 입에 담아본 느낌이었다. 나는 그 기묘한 지점을 느낀 그날, 고립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위기의식을 처음으로 느꼈다.      



-육체적 건강을 유지하는 것처럼 사람과 접촉을 유지하려고 애쓸 필요가 있다. 타인과의 접촉 수준 이상으로 유지하지 않으면, 지극히 간단한 사회적 행동마저도-누구를 만나서 커피를 마신다거나, 외식을 한다거나엄청나고 무섭고 피곤한 일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프랑스까지 헤엄쳐서 가려고 시도하는  못지않게 버거운 일로 느껴진다.



나의 사회적 근육은 부쩍 퇴화되어 있어서 작은 움직임에도 큰 피로함을 동반했다. 다시 제대로 걷기 위해서는 영양제도 챙겨 먹어야 하고, 정기적인 치료도 필요해 보였다. 무엇보다 말벗이 필요했다! 불안과 우울, 고립을 뛰어넘게 해줄 친구.


3살 추정, 암컷, 말티즈 순심이가 우리 집에 혜성 같이 등장한 것은 그즈음이었다.      



-고독은 종종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배경으로 두고 즐길  가장 흡족하고 가장 유익하다. 적절한 균형을 지키지 못하면, 삶이 약간 비현실적인 것이 된다.



새로운 생명을 가족으로 들인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작고 소중한 동물이 내 집에 발을 들인 순간 마법처럼 말끔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순심이가 배경으로 있는 삶은 (실제로는 배경 그 이상이지만) 내 삶의 단정함과 조용함을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내가 그간 쌓아 올린 나만의 이 작은 세계가 사랑과 친밀함으로 가득 채워지는 경험은 나를 더 넓은 지경까지 데려갔다.


그렇게 고립에 벗어난 나는 ‘강아지 중독자’인 저자와 다시 똑같은 길을 걷게 되었다.

      

*

<명랑한 은둔자> 리뷰 2편으로 이어집니다.

한 10편까지 쓸 기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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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연초 기록을 담은 영상을 올렸습니다. 영상도 확인해주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Gb9Sl731c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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