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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퇴사만화 Dec 22. 2021

암환자 4년의 기록

올해도 살았다

*기고를 받아서 쓴 글인데, 많이 수정되어 올라갔길래 원본을 올려둡니다. 암환자 4년, 견주 4년의 기록.

 


서른여섯 살, 암 환자가 되었다. 망원역 인근의 유방외과에서 선생님이 조직검사 결과를 통보할 때 나는 처음으로 뇌가 상황을 인지하기도 전에 눈물이 먼저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거의 0.0000001초 만에 눈물 한 줄기가 주룩 떨어졌고, 이내 폭포수 같은 울음이 쏟아졌다. 나는 이제 죽는다. 죽을 거다. 내게 주어진 수명이 다른 사람의 것과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는데, 나는 그 한 평 남짓의 방에서 끝이구나 생각했다. 아직 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미련은 1도 없었다. 준비 없이, 예고 없이 결말을 맞은 조기 종영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아서 차라리 당혹스럽다고 해야 할까. 갑자기 끝이라고?


 별다른 이슈가 없으면 가지 않는 부모님의 집에 절망적인 뉴스를 가지고 향했다. 전화로 좌초지종을 들은 부모님은 예상보다 담담했는데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서였겠지만) 그 이유는 집에 도착해서야 알 수 있었다. 


 “오진이야. 네가 무슨 암이야! 그 병원, 돌팔이지.”


 부모님은 내게 찾아온 시련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어렸을 때 힘든 것을 이야기하면 애써 좋은 얘기만 해주던 그때의 그 방식이다. 그래서 나는 애써 힘을 주어 또박또박 사실을 다시 한번 이야기해주었다.


 “확실해. 암이야. 오진일 가능성은 없어.”


 그 말을 하는데 가늘게 목소리는 떨렸지만 나는 이제 나보다 마음이 약해진 부모님을 끌고 험난한 산을 넘어야 했기에 권위 있는 목소리로 앞으로의 일을 설계했다. 하지만 그것이 한낱  연기일 뿐이라는 것은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병원에 입원하고 수술을 하고 조직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불면의 밤을 보내는 딸을 옆에서 지켜봐야만 했으니까.


 다행히 결과는 썩 나쁘지 않았다. 전이 없는 1기 유방암 환자, 그것이 내가 받은 최종 통지표였다. 보험사는 인생 첫 수술을 암으로 치른 내게 위로금조로 얼마를 보내왔고, 열심히 출판 편집자로 살아오던 나의 일상은 그저 한 명의 암 환자로의 탈바꿈되어 있었다. 정기 검진을 받기 위해 병원을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병원은 사람을 딱 두 분류로만 정의하다. 아픈 사람, 안 아픈 사람. 나는 여기서 아픈 사람을 맡게 된 것이다.  


 병가를 내고 회복하는 중에 내가 가장 염원했던 것은 ‘일상의 회복’이었다. 나아가서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놈의 지긋지긋한 출근이 그렇게 하고 싶더라. 내 새로운 부캐인 암 환자를 지우고 회사에 가서 친구들을 만나고 수다를 떨고 시시껄렁하게 회사 욕을 하는, 그런 평범한 보통의 사람이 되고 싶었다. 무리 속에서 묻혀 전혀 눈에 띄지도 보이지도 않는 존재. 그저 모래알 하나 같은 사람. 그래서 서둘러 복직을 했고, 아침에는 일을 하고 오후에는 방사선 치료를 받는 일상이 시작되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무리하게 서둘러 일상에 뛰어들었나 싶은데, 그때는 조용한 방에 암 환자인 나와 단둘이 있다 보면 정말 치명적으로 나를 잃을 것만 같았다. 불면의 밤은 여전했지만 파주에서 서울을 오가는 일정 덕분에 그럭저럭 지쳐 잠드는 날도 늘었다. 


 나는 서둘러 내 인생에서 암이라는 이력을 지우려고 애를 썼는데, 그럴수록 고립되기도 했다. 누구에게도 내 고통을 쉬이 말하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위로를 구하지 않아서인지 어느 날 집 앞에 찾아온 남동생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간 이상한다고 느끼고 있던 것이 완벽하게 실체가 되어 드러났다. 


 ‘나 너무 오랜만에 누군가와 말을 하는 거 같아.’


 그제야 나는 내가 혼자 있는 게 좋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지만 삼 일이 멀다 하고 싸우게 되는 부모님과 같이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스스로 나를 구할 현명한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때 한 친구가 떠올랐다. 유기견을 입양해 삼 년째 살고 있는 친구였다. 왜 그때 그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내 우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메이트가 필요하다는 것을.


 “나, 강아지를 키우고 싶은데 어떨까?”

 “너 정말 잘 키울 자신 있어?”


 몇 번이고 나의 책임감을 확인한 친구는 강아지 초보인 나에게 세 살 정도의 성견이 사회성 형성이 잘 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덧붙여주었다. 그 말을 기억해두었다가 전국 보호소에 등록된 세 살 아이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방사선 치료가 끝나는 날, 나는 지금의 내 소울 메이트이자 하우스 메이트를 만나게 되었다. 호불호가 명확하고 먹는 것을 좋아하고 목소리가 소프라노처럼 맑은 순심. 내 투병기는 순심이의 등장으로 우울이 걷히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꼭 덧붙여서 말하자면 강아지 입양을 하기 전에 가족의 동의가 있었고, 유사시에 강아지를 맡아줄 것에 대한 약속도 확실히 받았다. 무엇보다 내 건강 상태가 강아지가 무지개다리를 건널 때까지는 양호할 것이라는 판단도 있었다.) 


 원고를 의뢰했던 편집장님은 ‘나의 꿋꿋한 투병기’가 결과적으로는 순심이의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이라 명랑 드라마의 여주인공 같은 스토리를 기대했다면 죄송한 마음이다. 누구의 투병기도 그렇겠지만 나의 투병기도 1기 암 환자였음에도 그다지 꿋꿋하지는 못했다. 밤이 되면 눈물이 너무 나서 밤이 오는 게 무서웠다. 콧물이 코에 가득 들어차 자고 일어나면 머리가 아파서 빈속에 두통약을 삼켜야 했고, 너무 잠이 오지 않을 날에는 새벽에 차를 몰고 나가 하염없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위로를 받자고 불러 모은 친구들의 무심함에 상처를 받기도 했다. 그런 나의 투병기에 2막이 시작된 것은 바로 이 요망한 강아지의 등장에서부터다.     


 2019년 1월 19일, 청주 보호소로 순심을 데리러 갔다. 가는 내내 잘한 선택일까, 내가 아이를 평생 책임져줄 수 있을까 고민이 되었다. 게다가 나는 그 아이의 성격도 모르지 않는가. 이건 사진만 보고 결혼을 하는 것과도 다르지 않은 상황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사무실에서 아이를 기다리는데, 누더기 털을 한 강아지가 직원분에게 안겨 들어와 발이 땅에 닿자마자 우사인 볼트급으로 전속력으로 사무실 전체를 열 바퀴쯤 돌았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 잘 살 수 있겠지?’   


 우리는 어설프게 입양 기록 사진을 찍고, 순심이 몸에 동물 등록 칩을 심고, 보호소에서 나왔다. 그리고 버스터미널 앞에서 진짜 덩그러니 둘만 남게 되었다. 나에게 가족이 생겼다. 아니, 생겨버렸다! 서울로 올라와 동네 동물병원에 가서 건강검진을 받고 순심은 누더기인 채로 집으로 입장했다. 첫 날, 순심은 패드를 깔기 전인데도 화장실에 가서 하는 배변을 해서 나를 놀라게 하더니 지금까지도 놀라게 하고 있다. 나는 천재 강이지를 입양한 것이었다!     


 살면서 줄곧 외로웠던 같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내 감정을 전이하고, SNS에 우울의 시를 쓰고, 누가 나 좀 봐줬으면, 알아줬으면 하며 이삼십 대를 보냈다. 그런데 이제 나는 감정에 그다지 휘둘리지 않는다. 주저앉아 있기에는 할 일(배변에 산책에 목욕에)도 너무 많고, 슬퍼하기에는 기쁨이 큰 사람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뭐가 그렇게 재밌고 궁금한지 눈알을 굴리며 나를 줄곧 쫓는 시선. 나는 그 눈과 마주칠 때마다 “뽀뽀 신청? 토크 신청” 하며 헛소리를 내뱉고, 괴상한 춤을 추는 실없는 인간이 되었다.  


 어쩌면 나의 정신세계 한쪽을 순심에게 의탁하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끈질기고 끝이 없고 유일하며 직접적이고 뜨거운 사랑에 살을 부비며 어제의 시름과 내일의 불안을 접어두며 그저 하루하루를 무던하게 살아내고 있다. (기쁘게 힘차게 살아내고 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그 다정함이 나를 구한 것이 분명하다. 나의 투병기를 꿋꿋하게 만든 것은 결국은 사랑이다. 다만 순심을 그 사랑의 리스트에 가장 위에 뒀을 뿐, 무수히 많은 다정들이 나를 스쳐 지나며 나를 건졌다.      


내가 암 선고를 받고 울면서 전화했을 때 아빠가 했던 말,    

“딸, 울지 마. 아빠가 어떻게 해서든 낫게 할 거니까 울지 마.”     


수술을 앞둔 밤, 불 꺼진 복도에서 엄마가 했던 기도,

“우리 딸이 남들만큼 살 수 있도록 해주세요.”     


대수롭게 않게 했던 오빠의 말,

“야, 아무것도 아니야. 요즘 암은 다 치료돼.”


그리고 언젠가 친구가 내게 보내주었던 메시지,

“그때 너의 슬픔을 잘 위로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계속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어.”     


 지금은 암 투병 4년차다. 질병을 관통해오며 나는 어떤 면에서는 관대해졌지만 어떤 면에서는 소중한 게 적은 사람이 되었다. 모두를 소중히 여기기에는 인생이 결코 길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이고, 그리고 그 다음은 나를 사랑하는 소수일 뿐이다. 그 집약된 사랑으로 나는 고통을 통과했고, 통괘해내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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